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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밑 환상들(1000자 춘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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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밑 환상들(1000자 춘추)

입력
1993.12.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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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밑에 접어들면서 몸과 마음이 공연히 바빠지는 것을 느낀다. 본디 사람들의 시간을 보다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하여 고안된 구성물에 불과한 월력이 무서운 힘으로 우리를 구속하고 재촉한다. 지난 해를 돌아보고 앞의 한 해를 내다 보도록, 또 7년 밖에 남지않은 20세기를 회고하고, 21세기를 점쳐보도록, 그리고 20세기와 함께 막을 내리게 될 천년기를 되돌아 보게 한다. 사가들이 흔히 근대와 전근대의 분수령으로 삼는 1500년. 세계는 명대의 중국 문화권, 유럽 문화권, 오스만 제국의 회교―이슬람 문화권, 그리고 모슬렘 치하의 인도 문화권등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그 내용과 성격에 있어 많은 차이가 있었지만 이들은 서로 맞먹는 수준의 발전 단계에 있었다. 

 그로부터 4백년후, 1900년의 세계는 하나가 되었다. 정치· 문화· 경제적으로 볼때 세계는 유럽, 그리고 그 연장인 미국으로 구성되는 서양제국으로 통합되었다. 몇 몇 나라들을 제외하면, 여타의 세계는 서양제국의 식민지, 아니면 보호령 또는 사실상의 속국들이었다. 서세동점의 엄청난 물결 속에 우리도 예외없이 처참하게 가라앉았다.

 그런데 그로부터 다시 1백년후, 2000년을 눈앞에 둔 오늘의 세계는 다시 파편화의 증후를 보이고 있다. 소련의 붕괴와 사회주의의 몰락에 따른 냉전체제의 종식은 얼핏 하나의 세계를 다시 공고히 하는 듯 했다. 그런데 냉전의 종식은 하나의 세계로의 회귀 대신 오히려 서양유일체제와 냉전구도 속에서 숨죽여 오던 문화· 종교· 인종간의 해묵은 반목과 분쟁들을 다시 역사의 전면으로 부각시키는 뜻밖의 결과를 가져왔다.

 2000년의 세계, 그것은 1500년의 그것과 닮은 꼴이 되어가고 있는가? 유럽문명은 과연 정체와 쇠퇴의 과정을 밟고 있는가? 또다른 문화권간의 전쟁이 시작되고 있는 것인가? 이 모든 물음들이 세밑의 부산함이 불러일으키는 환상일지도 모른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5백년 후 어느 누구의 세밑 환상속에서 한국은 지난 5백년과는 달리 뺄래야 빼놓을 수 없는 우뚝 솟은 한 부분이 되어 있어야 하겠다는 것이다.<김여수·서울대 철학과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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