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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한「히데요시가 이기지못한 조선무장」저자(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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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한「히데요시가 이기지못한 조선무장」저자(인터뷰)

입력
1993.12.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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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사학자 누키이 마사유키씨/“임란은 일의 차담한 패배죠”/“조선의병 결사항전 결정적 요인/명군 강화회담 치중… 역할 미미” 지난해 「히데요시(풍신수길)가 이기지 못한 조선무장」이란 의병장연구서를 통해 「임진왜란은 일본이 처참히 패한 전쟁」이라고 주장해 일본사학계에 충격을 준 누키이 마사유키(56·관정정지)씨가 내한했다. 그의 방한은 일본전역에서 모집한 역사연구회원 50명을 인솔해 자신이 연구한 의병장 활동지역 답사를 안내하기 위한것이다.

 누키이씨는 지한파 역사학자로 히데요시의 침략전쟁, 특히 조선내의 의병활동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로 일본내에서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그가 발표한 곽재우 정인홍 정문부등 의병장연구논문은 그들의 종친회에서 갖고 있는 자료보다 훨씬 상세하다.

 「전쟁은 상대가 있는 법」이라는 누키이씨의 역사관은 이제까지 히데요시의 승리만을 연구한 일본사학자들의 편향된 시각을 바로잡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그는 나고야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복지대, 애지현립대 강사를 거쳐 현재 나고야(명고옥) 동방학원 이사로 재직중이다.

 ―조선의병사에 대해 연구를 하게된 동기는.

 『대학재학중 도요토미의 조선출병을 공부하던중 일방적인 승리라는데에 의심을 갖게되면서부터다. 자료에는 1592년 3월 바다를 건널때 병력이 20만1천4백70명이었는데 1593년5월 진주성공격 직전에는 12만5천8백57명으로 1년만에 병력의 37%가 줄었다. 이는 일본군이 적지 않은 저항에 부딪쳤다는것을 의미한다. 이때부터 30년의 연구끝에 「히데요시가 이기지 못한 조선무장」이란 책을 내게 됐다』

 ―책의 내용 가운데 특기할만한것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침략배경과 조선민중의 저항, 곽재우등 조선의병과 이순신등 관군의 활동, 일본의 패배로 끝난 결과등이다』

 ―당신이 파악하고 있는 임진왜란은 어떤 전쟁인가.

 『임진왜란은 있어서는 안될 전쟁이었다.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는 임란전 방일한 조선사절단에게 「나는 신의 아들이다」라고 하는등 과대망상증이 심했다. 전쟁결과는 일본의 참혹한 패배였다』

 ―임진왜란이 일본의 패배로 끝난 이유는 무엇인가.

 『임란7년동안 꾸준히 활약한 곽재우 정인홍 정문부 이정암등 의병장들의 항전과 이순신장군등 관군의 활약때문이다. 조선민중의 외세 침입에 대한 결연한 저항은 이후 병자호란과 한일합방시 각 지방에서 봉기한 의병들과 맥을 같이 한다』

 ―당시 조선조정에서는 명의 원군참전이 일본을 패퇴시킨 결정적 요인이라고 본 시각도 있었다.

 『명군은 단 두 차례의 전투에만 적극적으로 참여했을 뿐이다. 평양성을 탈환해 자만하다 벽제관전투에서 패퇴, 이여송이 사지에서 살아난 후 일본과 강화회담에 치중했다. 울산성 순천성 사천성전투에서는 조선관군의 공격을 오히려 명군이 제지했다. 이것은 다 알려진 사실이다』

 ―당신의 임진왜란평가에 대한 일본사학계의 의견은 어떠한가.

 『그동안 일본사학계의 임진왜란연구는 일본측에서 본 조선원정이 전부였다. 지난해 「히데요시가 이기지 못한 조선무장」이 발간되고 올해 일본 학연사에서 펴낸 「임진·정유의 난」에서 많은 학자들이 임진왜란을 일본이 패한 전쟁으로 규정짓고 있다. 앞으로 많은 연구가 이뤄질 것이다』【임재만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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