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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냄비사회」냉정한 길잡이 역할을/김병국(나의 지면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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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냄비사회」냉정한 길잡이 역할을/김병국(나의 지면평)

입력
1993.12.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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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방문제 사전공론화 미흡 유감/농민고통 치유 꾸준한 관심둬야 우리는 언제나 달라질수 있을까. 대전환의 바람이 세계 전역을 강타할때 우리가 보인 일련의「행동패턴」은 엉성하기만 하다. 미국이 「태평양 공동체」라는 거창한 수사학을 구사하면서 개방에 주저하는 구주공동체와의 담판에 아태지역을 동원하려할 때 우리는 APEC정상회담의 이면에 감춰진 열강간의 정치게임에 무감각하였고 미국의 거대한 계획을 간과하였다. 오히려 신문과 방송매체의 전파를 타고 밀려온 정상회담의 소식은 신바람나는 한주일을 우리에게 선사하였다. 부국과 빈국의 갈등을 중재하면서 공존공영의 태평양세기를 열 조정자의 역할은 이제 한강의 기적을 창조한 한민족의 몫이라는 진단이 나올만큼 11월의 마지막 일주일은 장미빛의 신나는 하루 하루였다.

 대통령의 자신에 찬 말과 행동에 언론은 찬사를 보냈고 국민은 국력의 신장을 절감하였다. 국제화가 잃을것없는「마냥 좋은것」처럼 비추어진 위험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확신은 오래가지 않았다. 농산물시장의 부분개방에 동의하려는 정부의 시책이 알려지면서 우리의 미래에 대한 확신은 순식간에 무너져버렸다. 미국이 차려놓은「세몰이의 잔치」에 화려하게 참여하자마자 터져버린 사건이기에 심리적 충격과 갈등은 엄청났다. 제네바에서의 우울한「담판」소식이 연일 신문지상을 뒤덮었고 시장개방의 참담한 결과를 점치는 기사가 잇따랐다. 며칠전의 잔치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절박한 위기의식에 빠져 국가사회 전체가 방황하기 시작한 것이다. 국제화의 수사학은 신문지상에서 사라지다시피 하였고 거기에 그려진 미국의 형상은 국제정치의 무대에서 우리를 지원하기 보다는 자기 몫만을 챙기기에 분주한 「상인」 그 자체였다.

 지난 4주일의 신문을 보면서 생긴 고민거리는 다른 것이 아니다. 어떻게 여론이 이렇게 순식간에 달라질 수 있었는가. APEC정상회담에 참여한 정부나 이를 취재한 언론의 눈에는 12월15일이라는 최종 기한이 보이지 않았는가. 아울러 제네바의 소식을 시시각각 전할때마다 2·3주전의 이야기를 생각하면서 논리의 일관성을 지키려는 노력에 소홀하지는 않았는가. 아니 선거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강박관념때문에 지킬수 없는 공약을 남발하는것이 한국정치의 현주소라면 그를 대신하여 미리 1·2년전에 대비책을 찾으려는「공론」과「정론」의 산실 역할을 우리 언론이 떠맡을 수는 없었는가.

 물론 언론만을 탓하고자 하는것은 아니다. 하물며 실제 상황에서 정책을 선택하거나 사건을 취재하는것보다「상아탑」안에 앉아 비판하는 지식인의 역할이 훨씬 수월하다는 사실을 몰라서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은것은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비판의 동기는 언론에 대한 기대이다. 우리의 정계와 학계가 어수룩하면 할수록 문제의 본질을 회피하기 보다 직시하면서 의제를 변화시키고 대비책을 모색하는 공론화의 일차적 책임은 신문의 몫일수 밖에 없다. 이에 실패할때 최대의 희생자는 경제사회 전체를 살린다는 명분아래 아무런 사전준비없이 냉엄한 적자생존의 시장원리에 내던져지는 우리의 농촌사회일 뿐이다.

 우리는 공론화에 나서기를 주저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언론문화나 정치문화의 단점과 한계에 기인한다고 단정하고 싶지는 않다. 

 그렇다면 한국일보에 바라는 것은 두가지이다. 하나는 냉철한 공론화의 산실로서 우리 정치문화의 장점이「단점화」하는것을 방지하는 역할이다. 다른 하나는 목전의 이익만을 생각하지 않는 우리의 문화적 정점을 살려 시장 개방에 따를 농민의 고통을 덜어줄 묵시적인「사회계약」의 체결과 명시적인 정부정책의 구상에 계속 힘을 보태는 역할이다. 12월 한달의 기사거리로 그치기에는 농촌의 문제가 너무 심각하다. 여기서 멈추지 말고 계속 농촌의 실상을 알리고 정부의 농정을 감시하는 기사가 나오기 바랄뿐이다.<고려대 정외과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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