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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재상」·「금맥대부」 명암교차/사망한 다나카일전총리 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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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재상」·「금맥대부」 명암교차/사망한 다나카일전총리 일생

입력
1993.12.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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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세정계입문 42년간 일정치 요리/록히드사건으로 징역살이 오욕도 16일 사망한 다나카 가쿠에이(전중각영) 전일본총리는 일본의 역대 자민당 최대파벌이었던 다나카파의 영수로 제6대 자민당총재를 지냈다. 생전에 「막후실력자」 「서민재상」등으로 불려졌던 그는 니가타(신석)현의 농촌에서 출생, 15세때 상경하여 점원생활을 하면서 공업학교를 졸업한 입지전적인 정치인이다.

 학교졸업후 토건회사를 설립, 한국전을 계기로 목돈을 벌었다. 46년 첫 입후보에서 낙선했으나 이듬해 현행헌법하에서 실시된 첫번째 총선에서 고향인 니가타3구에서 28세의 젊은 나이로 당선됐다.

 이후 견고한 후원회를 기반으로 모두 16회나 당선됐으며 89년 10월 병으로 정계를 은퇴할때까지 42년간 일본정치의 주역을 맡았다. 우정장관 대장장관 통산장관등 각료직과 자민당의 정조회장, 간사장등 주요 당직을 역임한후 72년 7월 후쿠다(복전)전총리와 소위 「각복전쟁」이란 치열한 싸움끝에 제6대 총재자리를 쟁취해 총리에 올랐다.

 그는 총리가 되자마자 중국과의 국교정상화란 큰 업적을 남겼으며 「일본열도개조론」을 주창하며 국토종합개발에도 힘을 기울여 국민들로부터 「다나카붐」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다나카금맥」(74년) 록히드사건(76년)등의 뇌물스캔들에 관련, 오명을 남기기도 했으며 83년 록히드사로부터 5억엔을 수뢰한 혐의로 체포되어 징역 4년 추징금 5억엔의 실형을 받았다. 이후 사돈인 다케시타(죽하등)가 배신하며 다나카파벌을 해체하고 새로운 파벌인 다케시타파의 리더로 부상하자 이를 저지하려다 85년 2월 뇌경색으로 쓰러지면서 정치적인 영향력을 상실했다.

 지난 7월의 총선때는 그의 장녀인 다나카 마키코(전중직기자)가 그의 선서구에서 출마, 첫당선됨으로써 대를 잇게 됐으며 사위인 다나카 나오키(전중직기)도 후쿠시마(복도)3구에서 당선됐다.【도쿄=이재무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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