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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악관­군부부협화 “희생양”/애스핀장관 사임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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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악관­군부부협화 “희생양”/애스핀장관 사임배경

입력
1993.12.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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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핵·동성연애자입대등 입장조율 “곤욕”/소말리아 작전실패로 여론압력도 가중 레스 애스핀미국방장관이 클린턴행정부의 새국방장관으로 발탁됐을 때 클린턴이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인물을 국방장관으로 선택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예일대를 거쳐 영국 옥스퍼드대에 유학한 천재형인데다 맥나마라전국방장관의 참모로 월남전을 치르면서도 날카로운 두뇌회전으로 「국방부의 4대천재」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후 70년 고향 위스콘신에서 하원에 처음 당선된이래 20년간 하원의원생활을 하면서 10년이상을 군사위원장직을 맡아 군관계인사는 물론 군사문제라면 모르는 분야가 없는 군사전문가로 공인되기에 이르렀었다.

 그는 또 사고의 폭이 넓고 자유로워 부시행정부의 보수주의 색채를 청산하려는 클린턴으로서는 가장 적절한 국방장관감이었다. 때문에 그는 장밋빛 기대를 받으며 국방장관에 취임했었다.

 그러나 애스핀은 국방장관 취임후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그는 언제나 장난기있는 어린아이들처럼 건들거리고 걸어서 공식석상에서 보면 도무지 미국의 국방장관이라는 인상을 찾아보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그의 이런 걸음걸이 탓인지 애스핀은 통솔력이 약하다는 평을 들었다. 머리는 좋으나 정리를 하지 못하고 군간부들을 모질게 틀어잡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동성연애자 문제로 시끄럽던 지난봄 일부 강경파군인들은 애스핀을 제쳐놓고 바로 의회 원로의원들을 찾아다니며 반대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애스핀은 일단 정치적희생양으로 그특유의 천재적 능력을 펴지 못한채 물러났다고 보는것이 적절하다. 그는 냉전체제붕괴이후의  미군재편에 장관직을 걸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클린턴의 선거공약을 어떻게 국방장관으로서 잘 처리하는가에 우선 과제가 매겨졌고 이 정치적역학관계를 감당하지 못해 백악관과 틈이 벌어져 끝내 사임으로 이어진것으로 풀이된다. 클린턴은 선거공약에서 동성연애자의 군입대를 허용하겠다고 말했고, 보스니아에도 신속히 군대를 파견해 부시행정부의 우유부단성을 청산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현실은 공약을 지키기에는 힘들게 돌아갔다. 동성연애자의 경우 군의 강력한 반발이 있었고 보스니아문제에도 유럽측의 미온적인 지지 때문에 섣불리 개입할수 없는 처지였던것이다. 애스핀은 백악관쪽으로부터는 리더십에 대한 눈총을 받았고 군은 군대로 대통령을 설득하지 못하는 장관을 불신하고 나섰다. 북한핵문제도 마찬가지였다. 군부는 강력한 대북한 대응을 주장했지만 백악관은 외교적 해결을 주장해 애스핀은 언제나 군부와 백악관의 중간에 서 곤욕을 치러야 했다.

 그는 지난 10월3일 소말리아 파견 미특공대가 아이디드체포를 위해 어느 건물에 기습공격했으나 실패하고 대원 18명이 사살되자 엄청난 여론의 화살을 맞았다. 그의 사임설이 나돌기 시작한것이 바로 이때부터였다.

 특히 사임 3일전인 지난 12일 애스핀은 NBC와의 회견에서 북한은 현재 핵무기 개발노력을 더이상 하지 않고 있다고 말해 북한제재를 향한 국제여론을 모으는 클린턴참모들을 당황케해 백악관측과 영원히 멀어지게 됐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애스핀은 강력한 국방장관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클린턴의 정치부담을 대신 지고 사임하는 의리를 지킨것으로 보인다.【워싱턴=정일화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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