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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청 긴밀협조 사건축소 뚜렷(개혁 풍운아 김옥균: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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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청 긴밀협조 사건축소 뚜렷(개혁 풍운아 김옥균:4)

입력
1993.12.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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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우 안전요청 조선관리 잇단 방문/이홍장“수사 조기종결” 비밀전보지령 김옥균에 대한 청국「신보」의 매도성 해설기사는 이튿날(4월2일)부터는 다시 사실보도로 바뀐다. 내용은 조선·청국정부의 긴밀하고도 신속한 수사공조체제, 암살범 홍종우의 당당한 환국등이 다뤄지면서 기사비중이 높아진다. 다분히 의도적이고 사건의 축소·조작이 자행되고 있는 느낌이 강하다. 

 「고려관리 상하이현 경찰서에 오다」(3면)라는 기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 조사를 마친 뒤 황대령은 즉시 강해관도(상하이현이 속해 있던 상급 행정단위)의 섭관찰사에게 보고했고, 섭관찰사는 고려 주재 상무대신인 위안스카이(원세개)에게 이 사건을 타전했다.

 어제밤 9시 고려로부터 회신이 도착했다.「김옥균은 고려 반신으로 도망간지 이미 오래이고 홍종우는 고려관원이므로 이 사건은 고려로 귀속시키는 것이 합당하다」는 내용이었다. 

○홍신변보호 만전

 대령이 모든 내용을 숙고한 뒤 홍종우를 체포한 영국조계의 노순경찰서로 가서 맥서장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상하이주재 영국 부영사 살윤격을 방문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일찍이 고려영사를 역임해 고려말을 할 줄 알므로 홍에게 이런 상황을 자세히 얘기해주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영국)공관은 옛갑문 남쪽에 있었다. 살윤격은 서울말을 할 줄 알아 통역관으로 쓸만 했다. 대령이 잠시후 홍을 공관으로 보내고 형리 두 명을 함께 보내 공관안을 교대로 지키게 했는데 어느 나라 사람을 막론하고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이는 혹시 김옥균의 지지세력이 홍을 몰래 해칠 가능성에 대한 대비책이었다.

 오늘 상오10시 황대령이 살부영사를 홍이 붙잡혀 있는 (영국조계)경찰서로 오게하고 맥서장이 내준 3명의 형사와 상하이현 경찰서의 형리 설귀등 모두 7명의 형리를 이끌고 홍을 호송해 영국조계에서 중국 통치권인 성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어떤 고려관원이 함께 가기를 원하므로 형리가 마침내 가마 두대를 빌려 고려관원과 홍을 가마에 태워 호송했다. 대령은 또 형리를 시켜 김옥균의 관을 호남회관에 잠시 맡겼다가 여객선이 오기를 기다려 배에 싣고 고려로 가도록 하고 홍도 같이 귀국시키도록 했다. 

 홍이 상하이현 경찰서에 도착한 후 대령이 그를 잠시 서쪽 채에 머물게 했는데 조금 있다가 상하이 군 통령인 소운경에 요청해 군인 4명을 보내 지키게하고 김옥균의 관도 형리에게 주의해서 지키게 했다>

 이튿날, 기사는 홍종우에게 포커스가 맞춰진다. 기사 제목은 「홍종우 사건의 일화」.

 <올해 32∼33세 된 홍종우는 대대로 내려오는 문신 집안 출신으로 음서로 벼슬을 얻었다. 마치 중국에서 5품·경당에 속한 사람이 명예로 벼슬하는 것과 같다. >

 난을 일으킨 김옥균이 실패해서 잠적한 뒤에 고려의 조야는 모두 그를 체포하고 싶어했다. 8년전에 이품 대신인 조의연이 조정에 상주하여 홍에게 조칙을 내려 김옥균을 죽이도록 했다…> 

 그러나 조의연은 개화파 인물로 그가 김옥균 암살을 사주했다는 보도는 사실과 다르다. 기사는 계속된다.

 <…홍은 이에 행장을 꾸려 일본으로 건너가 사방으로 김옥균이 있는 곳을 찾았다. 김옥균은 자신의 죄가 막중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감히 동포와 대면하려 하지 않았다. 이에 홍은 구미 두 대륙을 유람하고 3년 후에 일본으로 돌아와서 김옥균과 만나게 됐다. 이때 고육지책으로 김옥균이 자신을 의심하지 않게 하고는 반 년이나 겉치레로 친하게 지내며 은근하게 김옥균을 유혹해 상하이로 오게 했다. 홍종우는 그날 밤에 경솔하게 손을 대지 않고 22일(음력)까지 기다려 암살에 성공했다. 김옥균의 양아들 겸 일본인 하인인 기타하라가 이 때 김옥균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홍종우는 암살을 행한 후에 그가 보복할 것이 두려워 오송으로 도망가 잠시 피해 있었다.

○“잘 대우하라” 부탁

 또 홍에게 물었더니 본명이 종건이라 했다한다. (그는) 일본어와 불란서어에 능했다. 어떤 사람이 개명한 이유를 묻자, 조정에서 암살을 명령할 때 신분증에 건을 우로 잘못 써 홍종우로 불리게 됐다고 대답했다. 

 이전에 홍종우를 쫓아 상하이현 경찰서에 왔던 고려관원인  조한근이란 사람은 이전에 보도했던 것처럼 영국조계 경찰서에 와서 홍종우에게 무릎을 꿇었던 사람이다. 풍문에 의하면 그 사람은 고려의 모 정부기관에서 상하이로 파견돼 면화사업을 해왔다고 한다.

 상하이현 경찰서는 이미 고려에 타전해 고려에서 다음과 같이 회답해 왔다고 발표했다. 

 「김옥균은 국가의 반신이고 홍종우는 그를 암살했으니 비단 무죄일 뿐 아니라 공이 있으니 귀국에서 그를 잘 대우해주길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또 전보를 받은 고려조정은 대신인 조병식(조병식의 오식)을 파견해 배를 타고 상하이에 와서 섭관찰사와 모든 일을 상의하게 했다.

 이부상(이홍장)은『반신은 이미 주살되었으니 홍종우의 짐 속에서 발견된 이전에 왕래했던 모든 서신들에 대해서는 깊이 조사할 필요가 없다. 이 사건에 무고한 사람들이 연루되는 것을 바라지 않기 때문』이라는 내용의 전보를 쳐 보냈다>

 이홍장의 전보는 짤막하지만 사건의 조기종결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4월7일자 「고려 관리 상하이에 오다」(3면)라는 제목의 기사는 조선조정이 암살범의 안전송환과 죽은 김옥균의「체포」를 위해 관리를 또다시 파견한 사실을 보도하고 있다.

 <조선국 신하인 서씨는 홍종우가 반신인 김옥균을 암살한 사건 때문에 특별히 천진에서 상하이로 왔다.>

 그는 어제 정오 통역관을 대동하고 상하이에 도착했다. 그는 황대령 면담을 청해 접견실에서 만났다.

○김옥균 관싣고 환국

 그는 한참이 지나서야 비로소 말을 꺼냈는데 홍종우와 김옥균의 시체를 본국으로 돌려보내줄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황대령은 『우선 도헌에게 정확히 보고해 그의 결정을 기다려야 한다』고 답했다.

 조선관리는 또『갑신년에 김옥균이 모반을 꾀했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일본으로 도망갔는데 서기성이 명을 받들어 주 일본대표가 되어 모든 방법을 동원해 김옥균을 잡으려 했으나 김옥균은 매우 용감해서 잡히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후 그럭저럭 10년 동안 목숨을 부지하다 비로소 암살당한 것이라고 한다>

 며칠 뒤 홍종우가 청국 군함 웨이위안(위원)호에 김옥균의 관을 싣고 환국했다는 보도와 함께 김옥균 암살사건은 신보에서 자취를 감춘다.【상하이=서사봉기자】

◎김옥균의 세무덤/일에 2기 아산에 1기… 모두 유해없는 가묘

 김옥균의 무덤은 세개이다. 

 아니 그는 세 개의 가묘로 남았을 뿐이다. 그의 무덤에는 위패만 모셔져 있거나, 그의 머리카락만이 모셔져 있기 때문이다.

 주인없는 그의 「빈」무덤들은 김옥균의 비참한 최후를 증언하는 서글픈 증거들인 셈이다.

 평소부터 김옥균을 지원하던 일본의 두 그룹인 후쿠자와 유기치(복택유길)파와 두산파는 그의 암살 직후 「김씨 장의위원회」를 구성하고 상하이로 유해를 수습할 대표를 파견했다.

 그러나 그의 유해는 이홍장이 중국 군함 웨이위안호 편으로 조선에 보낸 뒤였고 이들은 빈손으로 돌아와야 했다. 위원회는 도쿄에서 제일 큰 절인 아사쿠사지(천초사)에서 일본 정객들이 대거 참여한 가운데 위패만 모신 장례식을 성대히 치르고 아오야마(청산)에 위패만을 모신 가묘를 세웠다. 

 「김옥균. 자는 백온이고 호는 고우이며 별호는 고균. 본은 안동이요 개국 4백60년 신해 1월23일생. 임신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이조참판에 이르렀다. 갑오년에 해를 입으니 향년 44세라…」

 그의 첫번째 묘에는 그의 죽음을 애도해 혁명동지 박영효가 짓고 대원군의 친손자 이준용이 쓴 비문이 이렇게 시작되고 있다.

 한편 조선으로 보내진 그의 유해는 다시 능지처참되고 한강변 양화진에서 효수됐다.

 그 머리를 몰래 훔쳐낸 사람이 김옥균의 의동생이자 후쿠자와의 제자인 가이쿤지(갑비군치)의 내연의 처 오야부 마사코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여장부로 알려진 오야부는 한 밤중에 남대문 성곽을 넘어가 장대에 매달려 있는 그의 목을 끌어내렸다. 한강물에 피묻은 얼굴을 깨끗이 씻은 뒤 보통 짐꾸러미처럼 위장해 자기집으로 돌아왔다.

 오야부는 가이쿤지에게 보인 뒤 다시 도쿄로 직행, 후쿠자와의 도움을 받아 신조지(진정사)에 묘소를 만들고 비석을 세워 그의 두번째 묘를 만들었다. 이 묘에는 그녀가 훔쳐온 김옥균의 머리가 항아리에 모셔져 묻혔다는 주장과 머리가 이미 썩어 머리카락만을 잘라 묻었다는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 

 김옥균의 유일한 국내 무덤은 충남 아산군 영인면 산일리에 있다. 그와 아무런 연고도 없는 곳에 세워진 가묘이지만 유일하게 혈육의 손으로 조성된 무덤이다.

 최서면국제한국연구원장은 『김옥균의 부인 유씨가 돌아가자 당시 아산군수로 일하던 양자 김영진씨와 친족들이 유씨의 묘를 쓰면서 그 옆에 김옥균의 가묘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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