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분필의 질이 예전보다 많이 좋아져서 가루가 훨씬 덜 날리긴 하지만, 교단에서 훈장 노릇하는 사람에게는 이 분필가루가 무척 큰 고역 가운데 하나이다. 이 고역을 면하게 해 주기 위하여 요즘은 훨씬 더 산뜻하고 먼지가 없는 하얀 칠판이 나왔다. 그러나 이것도 문제점을 안고 있다. 우선 필기구와 지우개의 값도 비싸고 쉬 닳는 편이다. 또 깜빡 잊고 필기구의 뚜껑을 안 닫으면 금방 말라서 못 쓰게 된다. 게다가 화학 물질로 만들어졌으니 필경 환경 오염에도 더 큰 몫을 하고 있을 것이다. 바야흐로 전기 전자 제품의 시대가 닥쳐 와 또 하나의 문명의 이기인 이른바 「오버헤드 프로젝터」라는 것이 등장했다. 불빛이 내비치는 통의 유리판 위에 투명하고 얇은 필름을 얹어 글을 쓰면 흰 벽이나 화면에 그대로 비쳐 나오는 기계이다. 필름에 복사한 것도 그대로 비쳐나오고, 색색의 빛깔도 그대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 이름이 너무 길어서 영어 자모의 첫글자 이름을 따 「오에치피」라고 부르는 일이 더 흔하다. 앞으로 대중화가 이루어지면 좀 더 대중적인 이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영어 이름의 「오버헤드」라는 말은 「머리 넘어」라는 뜻이다. 글 쓰는 사람의 머리를 넘어 건너 편 화면에 비치기 때문이다. 「프로젝터」의 「프로―」는 「앞쪽으로」라는 뜻이고, 「젝트」라는 부분은 「비추다」라는 말이다. 곧 「(글쓰는 이의) 머리를 넘어 앞에 비치는 도구」라는 길쭉한 뜻을 나타내고 있다. 좀 불필요한 의미까지 군더더기처럼 붙여서 장황하게 설명하는 말이다. 우리 말로 이름을 짓는다면 더 간편하게 만들어야 할 것이다.
우리 말의 「넘다」라는 낱말의 줄기인 「넘―」은 흥미롭게도 다른 동사의 앞에, 그것도 자동사와 타동사의 구별없이, 잘 붙는다. 「넘보다, 넘나다, 넘나들다」 따위가 그것이다. 글씨 따위의 말을 목적어로 삼아야 하기 때문에 여기에 타동사인 「비추다」를 결합시켜 「넘비추개」라는 명사를 만들면 이 기계의 기능이 그대로 드러난다. 사용하다 보면 불빛이 머리를 넘기도 하고 어깨를 넘기도 하니 굳이 「머리」라는 말을 써 가며 직역할 필요도 없다. 영어보다 훨씬 짧아서 좋고 앞으로 대중화될 때 누구든지 쉽게 이해할 수 있어서 또한 더욱 좋을 것이다.김하수(연세대국문과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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