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균 살해는 “그 죄가 씻을수 없어서”/“암살자 홍종우 공명심가진 협객” 옹호 청국 「신보」는 김옥균의 시체가 상하이 부두 남쪽에 있는 새 갑문(신)의 일본인 묘소에 가매장된 사실을 암살사건 3일 뒤인 1894년 3월31일자 3면에서 짤막하게 보도하고 있다. 제목은 「고려 반역자 김옥균 피살 뒷얘기」.
그러나 이튿날은 느닷없이 1면 머리기사로 대서특필되고 있다.
<사람들은 모두 김옥균이 외국에서 외롭고 욕되게 몇 해를 지내다가 어느날 배를 타고 와 어처구니 없이 홍종우의 손에 목숨이 끊어진 것을 애석하게 여기나, 그의 대역부도함과 그 죄가 실로 씻을 수 없다는 사실은 모른다…>사람들은 모두 김옥균이 외국에서 외롭고 욕되게 몇 해를 지내다가 어느날 배를 타고 와 어처구니 없이 홍종우의 손에 목숨이 끊어진 것을 애석하게 여기나, 그의 대역부도함과 그 죄가 실로 씻을 수 없다는 사실은 모른다…>
「김옥균도당 모반사건에 대한 해설」이라는 기사는 이렇게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한다. 점점 작아지던 기사가 갑자기 1면 머리기사로 커진 이유는 무엇일까.
○정치해설 곁들여
청국언론은 백주에 벌어진 김옥균 암살사건에 대해 사실보도 뿐 아니라 「정치적 해설」을 할 필요를 느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김옥균과 갑신정변에 대한 청국의 입장이 노골적으로 표현된 기사는 이렇게 이어지고 있다.
<고려 대원군의 화(임오군란)가 있었을 때 고려왕권을 구출해 열심히 나라를 다스리도록 희망했으나 모반이 다시 발생하고 만 것이다. 김옥균과 홍영식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은 재능이 없으나 일찍이 일본 등을 돌아다녀 외교를 대략 알므로 신임하여 국가의 권력을 맡겼던 것이다.>고려 대원군의 화(임오군란)가 있었을 때 고려왕권을 구출해 열심히 나라를 다스리도록 희망했으나 모반이 다시 발생하고 만 것이다. 김옥균과 홍영식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은 재능이 없으나 일찍이 일본 등을 돌아다녀 외교를 대략 알므로 신임하여 국가의 권력을 맡겼던 것이다.>
이 때 좌영사는 이조연, 전영사는 한규직, 후영사는 윤태준으로 각기 군권을 잡고 있었는데 김옥균이 온갖 계략으로 기회를 틈타 난리를 일으킴으로써 조정의 기강을 어지럽혔던 것이다.
고려왕은 미처 헤아리지 못하고 홍영식을 우정국총판으로 삼았다. 갑신 10월17일 하오 6시 우정국 낙성식 때 홍영식이 각국 사신과 중국 관리들에게 초청장을 보내 연회를 개최하니 명사들이 운집했다.
술이 몇 순배 돌았을 때 돌연 밖에서 『불이 났다』고 알려왔다.
김옥균등이 거사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금위대장군 민영익이 살피러 나갔다가 반란군에게 찔려 상처를 입고 안으로 들어와 땅에 쓰러졌다.
박영효 서광범을 데리고 곧바로 왕의 침궁으로 간 김옥균이 『청병이 난리를 일으켜 불이 나고 백성들이 피해를 입고 위험하니 일본공사를 빨리 불러들여 경비하게 하고 별궁으로 피신하라』고 왕에게 거짓보고했다. 왕이 머뭇거릴 때 돌연 포성이 진동했다.
김옥균 등이 『일이 급하니 늦출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이조연 한규직 윤태준 등에게 사람을 보내『만일 동참하면 성공할 경우 사직과 인민을 당신들과 함께 갖겠다』고 전했다. 세 사람이 거짓 허락하고 몰래 자기 나름대로 대비했으나 즉시 살해되고, 다시 조칙을 고쳐 민태호 조녕하 민영목 등을 처형했다. 김옥균은 스스로 호조참판이 되고 홍영식은 우의정이 되었다.
왕을 교체하고 강화도에 유폐시키려 했으나 결정을 보지 못했다. 각도의 군왕병이 이르자 마침내 왕을 위협하여 후원에 있도록 했다. 이때 김옥균등의 기세가 비록 하늘을 찌를듯 했으나 조신들 중에 따르는 자가 드물었다…>
취재진이 복사해 온 기사를 직접 본 신용하교수(서울대)는 『완전히 중국 입장에서 사실을 오도하고 있다』고 신보의 내용을 비평했다. 그는『왕의 교체나 강화도 유폐 부분은 사실과 다른 날조일 뿐 아니라, 기사 전체가 청국의 정책을 옹호하고 갑신정변을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내용』이라고 덧붙였다.
『당시 청나라는 1882년 7월 임오군란을 계기로 3천명의 군대를 파견하고 민씨 일파를 통해 내정간섭을 일삼으면서 조선에 대한 속방화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 분개한 김옥균 등의 급진개화파가 진정한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갑신정변을 일으킨 것이지요. 「갑신정변」으로 대표되는 개화파의 운동은 한국의 독립을 유지하려는 정책이었지 신문기사처럼 반역행위는 아니었습니다』
<…18일 조신들이 함께 의논해 고려왕을 보호해 줄 것을 청군에 요청했다. 청군이 이에 왕에게 오군문(청나라 군영)으로 오실 것을 청하니 북쪽 대궐로 도망했던 고려왕이 허락했다. 홍영식이 왕의 옷소매를 붙들고 놓지 않다가 군사들에 의해 살해되고 박영효의 동생 영교등을 참수했다…>
『왕이 도망갔다는 서술도 사실과 다릅니다. 당시 고종은 김옥균과 박영효를 신임하고 있었습니다. 고종은 당시 상황에 대해 의아해했을 뿐 도망할 이유가 없었습니다』(신용하 교수)
이광린의「개화당 연구」와 민태원의「김옥균전기」(을유문고간) 등도 고종은 청군의 침입으로 갑신정변의 실패를 인정한 김옥균이 홍영식과 도승지 박영교, 사관생도 4명에게 호위를 명령해 이들의 호위를 받으며 청군 진영으로 넘어갔다고 기술하고 있다.
신보는 계속되고 있다. <…김옥균은 도당들이 기가 꺾이고 두려워하는 것을 보고 일본 사신과 함께 제물포로 달아났다. 일본영사관이 불태워진 것도 이 때의 일이다. 민영익은 상처가 심했으나 죽지는 않았고 일본군은 33명이 죽었다. 역적으로 사형당한 자는 9명인데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은 실패 직후 일찍이 옷을 갈아입고 일본으로 도망쳤다.
○고려사신이 왔다
고려 사신이 배를 타고 천진에 와 이부상(이홍장)을 통해 보호해줄 것을 주청했을 때 우리 황제께서는 속국이 3백년 동안 순종했던 것을 생각하시고 차마 역적의 손에 떨어지게 하실 수 없어 연보창을 사절로 파견해 수습하도록 했다.
일본도 새로이 그들과 조약을 맺고 일을 끝내 고려의 반란은 제거됐다. 기자는 반란기간이 겨우 4∼5일 밖에 안되나 피해자가 많고 속국이 거의 없어질 뻔 했으니 김옥균 등은 그들의 고기를 먹고도 남을 만큼 죄가 크다고 생각한다…>
이런 청국의 시각은 김옥균을 우리나라 최초의 부르주아 혁명가로 찬양하는 북한 역사학계의 평가와도 크게 다르다.
「김옥균은 낙후하고 부패한 봉건제도를 반대하며 외래 자본주의의 침략으로부터 나라의 자주권을 수호하기위한 투쟁에 자신의 전생애를 바친 고결한 애국자였다. 그에 의해 지도된 갑신정변은 우리나라 최초의 부르주아 개혁 시도로서 조선 근세역사에서 빛나는 자리를 차지한다」(「김옥균」의 서문, 김석형 저, 북한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간)
신보는 계속된다. <…홍종우라는 자는 듣건대 고려의 유랑인으로 3년전에 옥균과 만났으나 미처 저격을 못하고 거짓으로 친하게 사귀어 오던 중 이번에 상해로 유인해 비로소 암살에 성공한 것이다…>
<…홍은 과연 어떤 사람인가. 아마도 젊은이로서 일을 좋아하는 호사가로 스스로 협객을 자처하는 자이리라. 그가 김옥균이 대역부도한데도 법망을 피해 수년을 지내는 것을 보고 계획을 꾸며 이름을 남기고자 한 것일 따름이다.
○속방화에 걸림돌
그렇다면 이 사건은 장차 어떻게 처리될 것인가. 중국과 고려 양국의 집정자들이 관계할 것이나 일본 영사 및 (영국조계의)경찰서장은 꼭 이 사건에 관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기사의 마지막 부분은 홍종우의 정체에 대한 추측기사를 통해 그의 복권을 시도하고 있다. 그를 재물을 노린 단순강도, 혹은 갑신정변의 공모자로「면죄부」를 얻기 위해 주모자를 제거한「이중반역자」등일 가능성을 추측한 끝에 공명심을 가진「협객」으로 결론짓고 있다.
그러나 김옥균에 대한 평가는 어떠한가. 그는 「애석하게 생을 마감한 망명객」으로부터「그 고기를 먹고도 남을 만한 죄인」으로 폄하되고 있다.
조선에 대한 속방화 정책을 추진하던 청국의 입장에서 자주와 개혁을 추진하던 갑신정변과 김옥균을 못마땅해 하는, 왜곡·날조된 시각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기사의 마지막 문장은 그 이후 조선·청국 양국정부에 의해 자행된 사건의 축소조작을 예고하고 있다.【서사봉기자】
◎미운오리 김옥균 죽이라:하/일 망명 박영효 등 암살음모는 실패
이일식은 3월25일 일본 고베(신호)에서 김옥균을 전송한 다음 한국인 권동수·재수형제와 일본인 가와쿠보(천구보상길)를 이끌고 박영효등 나머지 개화파요인을 암살하기 위해 도쿄로 직행했다.
그러나 교활한 이일식도 박영효와의 숨막히는 「숨바꼭질」 끝에 암살음모가 발각되고, 급기야 조선으로 압송되는 참패가 예정돼 있었다.
26일 만반의 준비를 하고 박영효등을 부하 가와쿠보의 숙소인 운래관에 초대해 일거에 해치울 계획을 세우고 있는 이일식에게 박영효로부터 「급히 만나고 싶다」는 전보가 날아들었다.
그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박의 동정을 염탐하기 위해 그가 경영하는 친린의숙에 심어놓은 첩자 김태원이 배반한 것은 아닐까」하는 불안이 스쳐 지나갔다.
세차례에 걸쳐 계속된 박영효의 초대를 약속시간보다 늦게 도착하는 방법으로 피해간 이일식은 28일 상오8시 드디어 권씨 형제와 가와쿠보를 이끌고 친린의숙을 찾았다. 이날을 넘기면 김옥균의 암살소식이 일본에 알려져 박영효암살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비상계획도 세웠다. 자신의 계획을 알아차린 박영효 일파가 먼저 의숙으로 들어간 자신을 문초하는 순간 부하들을 시켜 덮친다는 계획이었다.
의숙에는 이규완 정란교등 박영효의 수하 3명이 뭔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가 이일식이 나타나자 예상했던 대로 달려들어 준비했던 삼끈으로 그를 포박했다. 다 묶고나자 박영효가 나타나 그를 신문하기 시작했다. 이일식은 모든것이 예상대로 돼간다고 생각하면서 부하들의 등장을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그러나 기다리던 총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난입도 끝내 일어나지 않았다. 김태원을 통해 이일식의 계획을 알아차린 박영효 부하들이 그의 부하들을 이미 붙잡아 놓고 있었다. 그날밤 이규완 정난교등은 밤을 새워 이들을 감시했고, 이일식등은 이튿날 하오 출동한 일본경찰에 넘겨졌다.
결국 민씨 일파의 개화파 요인 암살계획은 김옥균만을 희생시켰을뿐, 박영효 서재필등 암살계획에서 살아남은 나머지 개화파인물들에 의해 개화사상은 독립협회 활동등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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