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하여 파격적인 환대를 받고, APEC(아·태경제협력체)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국가의 격을 높였다는등 요란하게 들떴던 정국이 쌀개방 논의로 일시에 냉각되더니 온나라가 벌집쑤신듯 시끄럽다. 쌀소동을 지켜보면서 많은 사람들은 실망과 배신감이 뒤얽힌 복잡한 감정을 품고있다. 그동안 우리는 「쌀개방 불가」를 줄기차게 외치는 정부당국자들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리곤 했다. 「쌀개방 불가」는 커녕 「쌀개방 불가피」가 멀지않아 발등에 떨어지리라는것을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데, 정부가 무슨 속셈으로 큰소리를 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우리가 짐작할수 없는 고단수의 전략이라도 있는것인지 궁금할 뿐이었다.
사실은 궁금했다기보다 불쾌했다는 표현이 더 적합하다. 정부당국자들이 「절대불가」를 외치는것은 정치적인 쇼라는것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쇼가 마지막 순간까지 국민을 속이기 위한것인지, 대외 협상을 위한것인지, 분명치 않았으므로 많은이들이 잠자코 있었을 뿐이다.
작년 겨울 김영삼대통령이 대선유세에서 『대통령직을 걸고 쌀개방을 막겠다』고 연설했을때도 그것은 「진실한 약속」이 아니었다. 그는 곧이어 열린 관훈클럽초청 토론회에서 『결국 쌀시장을 개방하게 될지도 모르는데, 정말 대통령직을 걸겠느냐』는 질문을 받자 『그만큼 쌀문제를 중요하게 다루겠다는 뜻』이라고 후퇴했다. 그는 쌀개방이 불가피할지도 모른다는것을 예상하면서도 『대통령직을 걸고라도…』라는 극단적인 유세용 약속을 했던것이다.
최근들어 「국제화」란 말이 대유행인데,쌀문제에 대한 대응만 보더라도 국제화와는 거리가 멀다. 「국제화」를 앞다투어 외쳐온 청와대 정부 여당 야당 할것없이 마치 우리가 결사반대를 하면 쌀을 개방안해도 되는것처럼 국민을 오도하고 있는데, 그것처럼 국제적 상식을 무시한 처사는 없다. 세계 12대 교역국의 하나인 우리가 과연 쌀시장을 언제까지 걸어잠글수 있을지, 오히려 국민들이 걱정을 하고있는데 정부는 전혀 실상을 설명하지 않은채 큰소리만 쳐왔다.
쌀시장은 결국 개방될것이므로 준비를 해야 한다는 말을 입밖에 냈던 소수의 사람들은 역적처럼 매도당했다. 특히 정부안에서는 『대통령직을 걸고…』라는 김영삼대통령의 발언이 족쇄가 되어 누구도 감히 「불가피론」을 입밖에 내지 못했고, 앵무새처럼 「절대불가」만을 외쳐야했다. 이것이 국제화할 태세가 되어있는 나라의 정부인가.
지난 며칠사이 정부 여당의 큰소리는 하루하루 강도가 약해지고, 다른 뉘앙스의 말들이 흘러 나오고 있다. 국민들이 예상했던대로 사태는 「개방불가」가 아니라 「개방불가피」쪽으로 기울고 있다. 그와중에서 정부가 쌀시장개방 불가의 대가로 금융과 공산품등을 추가개방하는 협상안을 제시하겠다고 밝힌것은 더욱 국민을 궁금하게 한다. 금융등을 추가개방 하고도 결국은 쌀을 개방해야 하는것이 아닌가.그 협상으로 쌀개방을 얼마나 늦출수 있으며 손익계산은 어떻게 되는가. 정부는 이런 점을 먼저 국민에게 설명해야 한다. 쌀문제에서 정부가 가장 잘못한것은 국민에게 거짓말을 하고, 국민을 바보취급했다는 것이다.【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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