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치 암도 뛰어넘은 무대열정/자궁암 고통딛고 혼신연기… “기립 박수”/“좌절않는 모습 딸에게 보이고 싶었어요” 신세계 천호점 문화센터에서 운영하는 주부극단의 회원 박은선씨(39)는 20일 동방점1층 국제회의실에서 공연된 연극 「점을 칩니다」에 출연했다. 공연이 끝나자 객석에 뛰엄뛰엄 앉아있던 박씨의 동료와 가족들은 아마추어배우의 연극수준에 걸맞지 않는 뜨거운 기립박수세례를 퍼부었다. 박수속에는 박씨가 중병속에서 일구어낸 인간승리에 대한 찬사가 담겨 있었다.
박씨가 연극과 관계를 맺은것은 건국대 1학년 재학시절. 입시부담에서 벗어나 모처럼 하고싶었던 일을 마음대로 해보겠다는 생각에서 연극서클에 가입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강력한 반대로 몇달안돼 그만둘수밖에 없었고, 그후 연극을 잊고 살았다.
20년이 지난 올 2월 신세계 천호점에서 날아온 조그마한 팸플릿 하나가 박씨의 잠자던 「끼」를 일깨웠다. 바로 주부연극강좌 개설안내 팸플릿이었다.
무조건 문화센터를 찾아가서 3개월코스를 등록했다. 회원 10여명이 민예극단 공호석대표의 지도로 「서울 말뚝이」 공연을 준비했다. 강좌는 1주에 1번씩이었으나 거의 매일 만나다시피했다. 마침내 5월말 천호점 옥상에 가설무대를 마련하고 문화센터에서 취미활동을 하는 주부들을 상대로 공연을 했다.
『연극이 끝나고 나니 생애 처음으로 잊고 살던 나 자신을 찾았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남편도 「당신에게 이런 면이 있었는지 정말 놀랐다」며 칭찬을 해주었고요』
박씨는 다시 공연이 하고싶어 6월부터 시작되는 2기강좌와 9월부터 개강하는 3기강좌를 계속 수강했다. 이번에는 「점을 칩니다」라는 연극을 준비했다. 산부인과 보호자대기실에서 각기 개성이 다른 4명의 남자가 아내의 해산을 기다리며 서로 나누는 대화를 코미디로 꾸민 극이었다. 박씨는 여기서 아들만 7명을 둔 남자은행원역을 맡았다.
인물표현에 한창 몰두해있던 박씨의 몸에 이상한 조짐이 나타난것은 9월말께였다. 주사나 한대 맞으면 나아지겠지 싶어 병원에 갔다가 뜻밖에 자궁암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눈앞이 캄캄했다. 지난달 2일 수술을 받았다.
『결국 또 한번의 짧은 연극배우생활을 이렇게 마감하게 되는구나』
병상에서 박씨는 자신이 중병에 걸렸다는 사실보다 연극을 할수있는 기회를 또 한번 잃고 말았다는 생각때문에 눈물을 흘렸다. 퇴원후 좌절감때문에 무기력하게 누워있던 박씨에게 다시 희망과 용기를 주었던것은 두딸이었다. 중간에서 포기하지않고 끝까지 해내는 모습을 딸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퇴원2주만에 불편한 몸을 이끌고 극단연습에 참가했다. 회원들은 뜨거운 포옹으로 맞아주었다. 남편에게는 공연당일까지 이 사실을 숨겼다.
박씨는 늦은 밤 이불속에 대본을 숨겨놓고 대사를 외웠다. 회원들과 함께 연습을 하다가 허리가 끊어질듯 아파 혼자 화장실에 가서 울기도했다.
공연 당일 박씨는 무대에서 쓰러진다는 각오로 연기를 했다. 연극이 끝나자마자 뜨거운 박수소리를 뒤로하고 곧장 집으로 달려간 박씨는 아이들을 꼭 껴안았다.
『엄마는 이제 어떤 무서운 병도 이길수 있을것같아』【이은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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