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은 텍사스주 댈라스의 하늘을 가른 수발의 총성으로 「뉴 프런티어」의 희망이던 고 존 F 케네디대통령이 숨진지 30주년이 되는 날이다. 미국인들만이 아니라 전세계에서 사랑을 받던 고케네디대통령의 모습은 사라졌지만 그의 매혹적인 삶과 이상은 한 세대를 뛰어넘은 지금 그의 열렬한 추종자이던 빌 클린턴미대통령에 의해 되살아나고 있는 느낌이다.
케네디와 클린턴은 천부적인 정치감각, 뛰어난 지능, 정의감, 세밀함등 비슷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된다.
17세의 클린턴이 63년 7월 백악관에서 케네디를 직접 만난 후 30년 동안 미국은 많은 변화를 겪었다. 인권신장이란 긍정적인 면이 있는 반면 계속되는 경제의 하향곡선이라는 부정적인 면도 있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속에서 시간을 초월해 민주주의를 추구하던 두 인물의 차이점도 명확히 드러나 미국민들의 관심을 끌고있다.
우선 국내문제에서 케네디대통령은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그의 무관심은 61년 그의 취임식 연설에서 국내와 관련한 유일한것은 「국내에」라는 단어라는 사실이 이를 반영한다. 진보주의자로 알려져 있는것 과는 달리 집권 초기에 흑인지도자들과의 모임을 회피하는 모습도 보였다. 반면 클린턴은 짐권초부터 국내문제에 중점을 두었다.
대외정책분야의 대응은 유사했다. 애초부터 무관심으로 출발한 정책이니만큼 큰 성과를 기대할 수 없는것은 자명하다. 쿠바침공, 흐루시초프와의 빈정상회담, 인도차이나 봉쇄등 케네디의 실패 사례들은 상당하다. 그 자신도 흐루시초프와의 회담을 「내 생애 최악의 사건」이라고 실토하고 있을 정도이다. 클린턴도 헤매기는 마찬가지다. 보스니아, 소말리아, 아이티문제등 출범초부터 여러가지 난제들이 그의 발목을 잡고있는 형편이다. 다만 케네디가 「공산주의 퇴치」라는 이념에 매달렸다면 클린턴은 냉전이후 후유증의 피해자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의회문제도 민주당이 절대 다수를 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에게는 공통적으로 어두운 그림자로 존재해왔다. 케네디의 가장 큰 문제는 남부지역의 보수주의자들과 그의 정책에 항상 시비를 거는 각 위원회위원장들이었다. 클린턴도 민주당내 반대파회유에 모든 신경을 쏟고있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통과과정에서 보여준 클린턴의 노심초사는 그의 상황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주었다.
클린턴과 케네디의 차이점이 가장 명확히 나타나고 있는 곳은 대언론분야이다. 양자는 모두 TV를 이용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으며 저널리스트들을 이용하는데 능숙했다. 그러나 30년이란 세월이 언론의 전반적인 상황을 바꾸어놓았을 뿐만아니라 케네디가 대중적 지지를 바탕으로 언론을 요리해 나갔다면 클린턴은 언론의 힘에 밀리며 확고한 지지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박희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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