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국민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교과서 이외의 책은 한권도 읽은 기억이 없다. 집에는 책이 없었다. 우리집에만 없는 것이 아니라 온 동네를 통틀었자 어느 집에도 별다른 책이 있을 것같지 않은 좁은 세계였다. 책이 그다지 흔한 시절도 아니었다. 단한번 국민학교에 입학하기전, 어디서 용케 빌려왔던 것일까, 어머니가 옛 이야기삼아 읽어주던 책이 생각난다. 하도 희한했던 일이라 지금도 그 책의 이름을 외고 있다. 「무쇠탈」(철가면)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직접 읽은 것이 아니므로 교과서 이전의 내 독서목록일 수도 없다. 아무리 책이 귀했기로서니 우리 집에 장서가 한권도 없었다니, 그 생각을 하면 지금도 억울해진다. 책이 얼마나 귀중한 유산인가를 깨닫게 된다. 이와 정반대의 경우를 우리는 사르트르에게서 찾을 수 있다. 그의 자서전인 「말」에는 어린 시절의 책읽기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2세때 아버지를 잃고 그때부터 어머니를 따라 외조부의 집에서 길려진다. 그 외조부의 서재는 책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책에 둘러싸여 인생의 첫걸음을 내디뎠으며 죽을 때도 필경 그러하리라』
사르트르는 아직 글을 읽을줄 몰랐는데도 이 선돌(립석)같은 책들을 존경했다. 먼지낀 책을 만져보며 먼지가 손에 묻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그는 이 책들이 자기집 가운을 좌우하는 것이라고 느꼈다. 철들면서 이 책들을 손에 잡히는대로 탐독하기 시작한다. 외조부의 서재는 그에게 유일한 놀이터였고 하나의 자연이었다.
『나는 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들의 짙은 추억도 즐거운 탈선도 없다. 나는 땅을 파본 일도 새 집을 쑤셔본 일도 없다. 꽃을 꺾어 모으러 나가지도 않았고 새들에게 돌을 던져보지도 못했다. 오직 책들만이 나의 새들이며 새집이며 가축이며 외양간이며 시골이었다』
선대의 장서가 한 후대의 인간형성에 얼마나 큰 환경인가는 사르트르의 뒷날 명성이 증명한다.
서울의 영풍문고 이벤트홀에서는 지난주부터 조그만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책의 해 행사의 하나로 한국애서가클럽이 세계의 장서표를 모아 진열한 것이다. 30명의 한국작가가 신작들을 만들어 선보였고 21개국의 7백여점이 출품되었다.
장서표라면 우리에게는 비교적 생소한 것이다. 소장한 책의 표지나 안쪽 겉장에 붙여 자기 장서임을 표시하는 지편을 말한다. 대개는 그림을 그리고 좋아하는 명구를 적어넣기도 한다. 자기 이름외에 반드시 들어가야하는 만국 공통의 문구가 「엑스 리브리스」(EX-LIBRIS)다. 라틴어로 「장서중에서」라는 뜻이다. 인쇄를 해도 되지만 판화로 제작하는 것이 미술작품으로서의 가치도 있어 선호한다.
장서표는 15세기중엽 독일에서 시작되었다. 구텐베르크가 활판인쇄를 발명한 얼마후 책을 귀하게 여기는 정신의 표현으로 발달했다. 장서표를 아끼는 사람들의 모임인 장서표협회가 현재 30개국에 있다.
동양에서는 예부터 장서인이 전래되어온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이래 궁중도서에 장서인이 찍혀오다가 한말이후부터 개인도 썼다. 장서인은 대개의 경우 기명에 그치는 것이 장서표와 다르다. 장서표는 동양에서도 17세기께부터 장서인의 일종으로 사용되어왔고 우리나라 책에 처음 붙은 것은 대한제국 때였다. 가장 널리 보급된 일본에서는 특히 80년대이후 성행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지금 장서표를 쓰는 사람이 별로 없다. 개인의 장서인도 자꾸 줄어가는 경향이다. 책이 흔해지면서 책의 희귀가치가 떨어져서이기 때문이라고 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책이 많이 나온다고 해서 책 자체의 가치가 변질되는 것은 아니다. 귀하지 않더라도 귀중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책의 대량 생산시대라 사람마다 장서가 너무 많아 일일이 장서인을 찍거나 장서표를 붙일 겨를이 없는 것일까.
지난 11월15일 출판문화회관에서는 한국출판연구소의 국민독서실태조사 발표회가 있었다. 이 조사결과를 보면 우리나라 성인의 장서량은 50권미만이(「없다」까지 포함) 41.3%를 차지한다. 책을 2백권도 안가진 사람은 도합 86.8%에 이른다. 이들이 다 가난하고 공부안한 사람들일 수 없다. 가구별 월소득 2백만원이상 3백만원미만의 74.1%가, 3백만원이상의 74.5%가 여기에 포함된다. 적어도 중산층 가정의 70%이상이 2백권미만의 책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집안에 호화판 가구가 없는 것은 부끄러워도 책장 하나 보이지 않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들을 위해 장서표가 있다. 책 한권 한권에 자신이 개별 주문해 만든 예쁜 장서표를 한장 한장 붙여가는 재미로라도 책을 사모으게 된다. 책은 당대만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책의 내용은 영원히 썩지 않는다. 먼지가 묻을수록 고의(고의)가 새롭다. 유산으로 치면 책만한 유산도 없다. 천금(천금)보다 상속세없는 천권의 책을 물려주는 것이 자식을 사랑하는 길이다. 그리고 사르트르처럼 어릴때부터 책더미속에서 자란 사람은 평생 책으로부터 원거리에 있지않게 된다. 이 책의 해에 각자 장서표부터 만드는 것이 좋다.【본사상임고문·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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