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원은 항시 거짓말로 일관/「진실의 그림」 찾는게 기자책무/정부통제땐 사후반격 할수밖에□인터뷰=김영걸 국제부기자/워싱턴에서
언론기능의 요체는 행정부에 대한 견제와 균형에 있다. 요즘의 한국언론은 문민시대를 맞아 구태를 벗기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김영삼정부의 「개혁드라이브」에 밀려 제자리를 찾지 못한채 끌려가고 있다는 일부의 지적도 있다. 언론과 정부간의 새로운 관계정립이 요청되는 시점을 맞아 한국일보는 지난 72년 워터게이트사건을 파헤쳐 닉슨미대통령을 물러나게 한 벤 브래들리 워싱턴포스트지 부사장(72·당시 편집국장)을 만나 바람직한 언론상에 대한 의견을 들어보았다.【편집자 주】
―반세기에 가까운 세월을 언론에 종사해오신것으로 알고 있습니다.기자와 편집간부생활을 통해 얻은 신조가 있다면 어떤 것인가요.
○워터게이트 폭로
▲글쎄요. 진실은 두가지가 될 수 없다는 믿음이라고 요약하고 싶습니다. 물론 진술이 엇갈리는 여러 취재원으로부터 사실을 파악하는 일은 그리 쉬운 작업이 아닙니다. 그러나 진실에 가까운 「완벽한 그림」을 그려내는 일이 바로 기자들의 책무입니다.
워터게이트 전모와 관련된 기사도 4백여가지가 넘어 어떤게 가장 정확한 것인지를 단언하기는 매우 힘듭니다. 하지만 당시 닉슨이 국민을 기만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했고 그의 거짓말이 이 나라 민주주의 존립에 커다란 위협이 되고 있다고 우리는 확신했습니다.
이 사건을 취재한 보브 우드워드나 칼 번스타인같은 젊은 기자들의 진실에 대한 집념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편집을 책임진 나로서도 일부나마 진상이 밝혀진 이상 끝까지 물고 늘어지기로 결심했습니다.
하지만 일천한 경력의 두 젊은 기자가 물고온 대특종이 오보일 가능성에도 대비해야 했고 이로 인해 실추될지도 모르는 국가위신도 고려해야 했습니다. 일부에서 「너무 많이 나간게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멈출수 없었습니다. 이미 진실을 갈구하는 모든 사람들이 나를 지켜보고 있었고 나 또한 하나일 수밖에 없는 진실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워터게이트사건 추적과 관련된 외압은 없었습니까.
▲사건이 점점 확대되자 닉슨측은 포스트지 소유의 지방방송국 허가취소를 빌미로 반격을 가해왔습니다. 사주인 캐서린 그레이엄여사도 주식값이 폭락하는등 악조건에 시달려야 했죠. 그러나 그는 이사건으로 신문사가 망하리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오보로 판명됐을 경우 그레이엄회장은 나를 해고하고 사과성명 같은 것을 발표했겠지요. 하지만 우리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우드워드같은 친구들은 이사건이 미언론의 대전환점이 되어야 한다고 우겼습니다. 즉 워싱턴정가나 언론계등 엘리트집단 내부자들만의 전유물인것처럼 인식돼온 공공연한 비밀들이 이제는 모든 국민들에게 공개돼야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과거에 비해 미언론의 대정부 견제기능이 많이 약해졌다는게 일반적인 평가인듯 합니다. 특히 걸프전 당시의 미국언론은 지나치게 「애국적」이었다는 비판도 있었는데요.
▲글쎄요. 대체로 맞는 얘기라고 인정합니다. 걸프전때는 너도 나도 애국심을 발휘했던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정부의 보도통제였습니다. 포스트지의 경우 6명의 기자를 파견했는데 이틀동안 아무도 기사한줄 보내질 못했습니다. 군당국이 컴퓨터나 통신장비의 사용을 철저히 통제했기 때문이지요. 이와 반대로 소말리아 상륙작전의 경우엔 이른바 「워치독」(감시자)기능이 지나쳐 웃지못할 TV쇼를 연출하고 말았습니다.
대체로 정부가 통제를 가할때 언론이 즉각적으로 대응할수 있는 방법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걸프전의 경우에도 월터 리프만의 표현대로 『시간이 아무리 걸려도 진리는 서서히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권력과 언론의 구조상 언론은 나중에 반격을 가할 수밖에 없는듯합니다.
○WP 시장성 불안
―언론과 정치인의 관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난 45년간의 언론생활을 통해 확실히 체득한 것은 정치지도자나 정부각료들은 누구든지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잘한다는 점입니다. 워터게이트 도청사실을 부인한 닉슨은 말할것도 없고 미국역사상 가장 유능한 대통령으로 간주됐던 케네디마저 자신의 건강에 대해 국민을 속였습니다.
나는 지난 59년부터 뉴스위크의 케네디전담기자로서 그와 각별한 친분을 맺어온 덕분에 그가 에디슨씨병이란 희귀한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를 끝까지 감추며 부인했습니다.
―향후 미국신문사업의 전망을 어떻게 보십니까.
▲포스트지의 판매부수는 증가하지만 시장성은 불행히도 그렇지 않습니다. 뉴욕타임스도 비슷한 상황에 놓여있는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짜 걱정거리는 TV에만 친숙한 미국의 젊은세대들이 요즘 신문을 잘 읽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최근 한 자료에 의하면 이들의 평균 신문구독시간은 14분인 반면 TV시청시간은 4시간반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습니다. 국가장래마저 염려되는 심각한 현상입니다.
―재직기간동안 포스트지의 변화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
▲내가 워싱턴포스트에 투신한것은 1948년 크리스마스날이었습니다. 당시 이신문은 워싱턴지역에서도 2류지에 불과했죠.
회사의 적자규모도 엄청났습니다. 하지만 일류지로 도약해보려는 사주와 젊은 기자들의 의지는 대단했던것으로 기억됩니다.
포스트지를 잠깐 떠나 4∼5년간 유럽에서 뉴스위크특파원 및 공보담당 외교관생활을 하는등 외도의 경험도 있습니다. 지난 59년 그레이엄가가 뉴스위크지를 매입하는데 중개역할을 한 계기로 포스트지 편집국에 다시 돌아올수 있었습니다.
○경영과 편집 분리
심한 우울증에 시달려온 필립 그레이엄회장이 63년 자살했을때 부인 캐서린은 신문경영에 대해선 백지상태였습니다. 당시 부인은 자신이 실제로 신문사를 경영한다기 보다는 자녀들이 성장할때까지 「섭정」을 하겠다는 입장인듯 했습니다. 그러나 부인의 강인한 정신력과 뛰어난 용병술은 결과적으로 남편이 이룬것보다 훨씬 위대한 신문사를 구축해왔고 이를 아들 도널드에게 넘길수 있었습니다.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미국의 거의 모든 주요 언론사들은 족벌소유경영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경영과 편집은 철저히 분리되어 있습니다. 지난 30년이상 이곳에서 일해오면서 경영진으로부터 기사와 관련된 간섭을 단한번도 받아본적이 없었습니다.
□약력
▲1921년 미매사추세츠주 보스턴 출생
▲42년 하버드대 졸업
▲42년 해군ROTC장교로 2차대전 참전
▲48년 워싱턴포스트 입사
▲59년 뉴스위크지 워싱턴지국 케네디 전담기자
▲65년 워싱턴포스트 편집국장 대우
▲72년 워터게이트사건추적 진두지휘
▲91년∼현재 워싱턴포스트 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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