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정운찬(한국논단)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정운찬(한국논단)

입력
1993.11.11 00:00
0 0

 한국경제가 중화학공업부문의 중복·과잉투자로 홍역을 앓던 1979년 일단의 경제(경영)학자와 경제인들은「중장기개발전략에 관한 연구」란 책자를 펴냈다. 발간은 12월에 되었지만 연구는 주로 여름에 이루어졌다. 이름을 드러낸 연구진뿐 아니라 여러 방면에서 초청된 익명의 전문가들도 삼복더위속에서 수차례의 세미나를 통해 한국경제가 지녀야 할 철학과 또 나아가야 할 방향에 관해 의견을 수렴하고자 노력하였다. 세미나 참석자들은 한결같이 한국경제가 일대전환기에 놓여있다고 진단하였다. 그들은 1960년대와 70년대에는 풍부한 유휴노동력이 존재하여 외자도입을 통한 생산시설의 확충만으로도 수출신장과 고용증대를 동시에 달성할 수 있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80년대의 문턱에서 점차 격해져 가는 국가간의 경쟁과 국내외 노동력상황을 고려할 때 유휴생산요소의 동원을 통한 외연적 성장전략으로는 한국경제의 발전을 지탱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앞으로의 정책기조는 노동과 자본의 생산성 향상을 통한 내연적 성장을 유도하는 방향으로 재정립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연구보고서는 계속해서 우리는 경제를 새로이 그리고 냉철히 보아야 한다고 지적하고 나서 내연적 성장을 위해서는 인적투자의 확충, 창의성의 창달, 경쟁원리의 도입, 인플레이션의 억제, 경제정책목표의 일관성 유지, 정부의 신뢰회복 등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또 각 경제주체들에 대한 조언도 잊지 않았다. 정부는 할 일과 안할 일을 잘 구분하여 민간의 창의성 발휘를 극대화할 수 있는 환경조성에 노력하여야 하고, 기업은 슘페터적 이노베이션이 필요하며, 일반인은 경제하려는 의지를 되찾아야 한다고.

 그로부터 14년이 흐른 오늘날 우리들은 한국경제에 거의 똑같은 진단과 처방을 내리고 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그것은 지난 14년간 우리 경제가 양적으로는 성장하였을지 몰라도 질적으로는 변화한 것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이는 곧 지난 세월동안 한국경제가 내연적 성장을 위한 준비를 게을리하였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제5공화국은 대외적으로는 원유와 원자재가격의 하락, 대내적으로는 긴축적 재정·금융정책 그리고 강압적 가격지도 덕분에 물가안정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무리한 (물가)지수정책의 결과 생긴 억압형 인플레이션은 다음 정권에 심각한 부담만을 안겨주었다. 억압형 인플레이션은 항상 개방형 인플레이션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또한 물가를 잡기위해 전력투구하는 과정에서 설비투자나 사회간접자본투자 등 장기적인 성장기반을 마련하는 일을 등한시하였다.

 게다가 3저로 인한 거시경제지표(성장률, 물가상승률, 국제수지)의 호전은 정권담당자에게 「하면 된다」는 신념을 심어주어 상명하복식의 경직적 경제정책을 부추겼다. 그러한 상황에서 어렵고 외로운 체질개선을 주장하는 소수의 목소리는 공허한 메아리가 되고 말았다.

 노태우정부는 5공정권으로부터 화려한 경제지표속에 감추어진 허약해진 경제체질을 물려받아야만 했다. 다른 무엇보다도 4반세기동안에 공룡처럼 커진 재벌문제와 함께 고비용 거품경제 때문에 경제를 정상적으로 운영하기 힘들 정도였다.

 이에 일련의 개혁파들이 형평성의 제고와 공정한 경제질서의 수립을 위한 정책대안을 들고 일어썼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토지공개념과 금융실명제를 내걸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5·8대책등으로 재벌의 이상비대화를 막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국제경쟁력강화를 위해 이른바 업종전문화를 시도한 것도 이때였다.

 그러나 재벌과 언론의 결탁과 대통령의 우유부단은 개혁파의 이상을 좌절시켰고 급기야 이들은 일선에서 중도하차하였다.

 제6공 2기는 어떤가? 김영삼정부는 체질개선에 유리한 조건을 갖고 출발하였다. 역대정권에 꼬리표처럼 붙어다니던 정통성시비에 말릴 부담이 적어 단기적인 성과보다는 장기적인 안목으로 국정을 운영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다. 사회전체에 만연된 부정과 부패의 고리를 차단하고 각종 제도개혁을 이루기만 한다면 단기에 울고웃는 거시경제지표에는 병적집착을 보일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신정부는 반짝경기를 목표한 신경제1백일계획으로 집권초기를 낭비하였다. 현재 경제상황이 어려운 것은 지난 2,3년간의 긴축 때문이 아니라 성장잠재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며 이러한 문제는 1백일이라는 단기간내에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닌데도 말이다.

 신정부가 뒤늦게나마 경기부양에 연연하지 않고 실명제, 금리자유화, 국제화등 제도개혁에 착수한 것은 환영할만 하다. 그러나 아직도 문제는 많이 남아있다. 그중 하나는 재벌이 효율적으로 재편(리스트럭처링)될 수 있도록 당근과 채찍을 적절히 제공하는 것이다. 좋든 싫든 전체경제가 재벌위주로 움직이는 상황에서 이들의 구조개선 없이는 내연적 성장은 아예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근 확정된 재벌의 업종전문화 정책이 채찍은 생략한 채 당근만을 주는 것으로 변질되어서는 안된다.

 이에 보태서 한번 더 강조하고 싶은 것은 「경기규칙」의 확립이다. 유정호박사(KDI·「경기규칙과 개혁의 방향」)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사람이 부, 권력, 명예를 쫓는것을 인생경기에 비유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얻는가를 지배하는 법, 제도 및 그 운용과 사회관행 등은 「경기규칙」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것은 경제는 바로 경제주체와 경기규칙의 두 요소에 의해 만들어지며 경제주체의 경제하려는 의지와 공명정대한 경기규칙없이 내연적 성장을 이룬 나라는 없다는 사실이다.

 정부는 어렵고 외롭더라도 국민의 경제하려는 의지 고취와 함께 공명정대한 경기규칙 확립에 힘써야 한다. 쉬운 길을 버리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보다 더 적절한 표현은 없을 듯 하다.<서울대교수·경제학>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