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인 취향 작품속 반영… 한·일 회화교류 파악에 “귀중자료” 조선의 외교는 사대교린으로 집약된다. 중화 세계관 속에 문화가 앞선 중국의 역대 왕조와 교류한 형식을 사대라고 한다면, 왜와 여진 그리고 유구같은 문화가 뒤떨어진 나라와 맺은 관계는 교린이다.
조선왕조는 세종대부터 순조대에 이르기까지 19차례의 사절단을 일본에 보냈다. 이른바 조선통신사이다. 통신사의 일행은 대개 4백명에서 5백명에 이르는 큰 규모였다.
이들이 머무는 지역의 객사는 찾아오는 일본 유자와 문인 및 뭔가 새로운 것을 배우고 싶어한 백성들로 인산인해였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 조선 선비들은 자연스럽게 휘호를 써주고 시회를 열며 새로운 문물을 건네주는등 문화면에서 교류가 이루어졌다. 이 때 써준 글과 그림은 일본의 관료나 무사를 비롯한 문인과 서민들의 정성어린 애호 속에 보존돼 왔다.
두암 김롱두씨가 소장한 그림 가운데 조선통신사로 일본에 간 저명한 문인화가들의 그림이 상당수 있다. 조선 중기의 화원으로 산수화와 인물화에 뛰어났던 김명국(1600∼졸년 미상)이 1643년에 그린「수로도」, 파격적인 행적과 남다른 기행으로 유명한 최북(1712∼1786년)이 1748년에 통신사 일행을 따라 일본에 가서 그린 「수각한담도」, 또 남종화의 화풍에 능숙한 이성린(1718∼1777년)의 그림 「예장소요도」가 대표적이다. 그리고 이수민(1783∼1839년)이 그린 「송하독서도」도 있다.
이 그림들은 조선 중기와 후기에 통신사를 통한 두 나라 사이의 회화교류 사실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조선 중기 화가 김명국의 「수로도」는 그의 인물화 중에도 우수한 작품이다. 죽장을 짚고 선 노인의 인물을 간략한 필치로 묘사한 그림은 보는 이로 하여금 생동감을 느끼게 한다. 윗부분에는 1643년 통신사의 제술관으로 도일한 박안기의 찬문과 낙관이 있어 제작 연대를 분명히 알 수 있다.
지금 남아있는 유작이 비교적 많은 최북의 「수각한담도」는 그의 초기작으로서 드물게 세련된 기량을 보여주는 수작이다. 이 그림 한편에는 「무진계하 조선국거 기재칠칠사」라고 쓰여있다. 칠칠은 그의 이름 북자를 파자한것이다.
이성린의 「예장소요도」는 간단한 구성과 거친 필법으로 당시 일본인들의 취향을 따라서 그린 작품같다. 그의 작품 「산수도」 쌍폭은 평양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이수민의 「송하독서도」는 비스듬히 경사진 언덕에서 역시 옆으로 뻗어오른 나무 뒤의 풀밭에 앉아 책을 읽는 선비를 그린 그림이다. 고목에 물이 올라 새순이 솟아나고 풀밭에 새싹이 난 모습에서 따스한 봄날의 정경이 배경인 것을 알게 된다. 진한 먹과 연한 먹이 서로 어울려 나무 줄기의 역동성과 선비의 정적인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최성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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