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와 세계를 향하여」가, 김영삼대통령이 어제 아침 신경제추진회의에서 행한 연설의 제목이다. 『과거를 과감히 떨쳐버리고…희망찬 미래의 건설에 매진할것』을 제안하는 내용이어서 눈길을 끈다. 대통령은 『이제는 우리의 눈을 밖으로 돌려 세계와 경쟁하며 살아가는데 필요한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한다. 「과거 집착에서 미래 지향으로, 시선을 안에서 밖으로」의 전환을 말하고 있는 이런 연설은 경우에 따라서는 매우 획기적인 선언이 될것도 같다. 특히 「과거」문제를 두고 정치권은 그동안 『어떻게 떨쳐버릴것이냐』로 매우 소모적인 논쟁에 휘말려왔기 때문이다.
여당은 대체로 『과거에 매달리는 일은 이제 그만 했으면 좋겠다』는 편인가 하면, 야당은 『과거문제의 청산 없이는 미래로 나아갈 수 없다』는 논리였다고 할수있다. 그러나 「과거」도 나름이어서, 각당은 계파마다 대상과 생각이 같지않은 특성을 지녀왔다.
하루전에 있었던 경주의 한일정상회담에서는 역시 「과거사」가 가장 중요한 주제였음이 공교롭다. 1938년생인 호소카와일본총리는 그가 젖먹이이던 때 있었던 창씨개명을 포함한 여러가지 구체적인 「비도한 행위」들에 대해 진지한 태도로 반성·사과하는 말을 했고, 김대통령은 『과거는 잊어서도 안되지만 집착해서도 안된다』며 이른바 과거사문제에 대한 매듭의 의지를 내보였다.
하기는 한일간 정상의 만남이 있을 때마다 「유감」과 「통석의 염」과 「진사」따위의 말을 들어야하고, 그표현의 강도에 대해 이런저런 신경을 써야하는 달갑지않은 처지는 이제 그야말로 「매듭」을 지을 때가 된것이라고 생각한다. 「만날 때마다 사과받기」란, 그것이 그쪽의 진심이든 건성이든 듣는 쪽으로서도 갈수록 구차스러운 일이 될 뿐이다.
다만 다짐해 둘 것이 있다. 김대통령이 말하듯 「과거를 과감히 떨쳐버린다」거나 「매듭」을 짓는 일이 「과거를 잊어버려도 좋다」거나 「청산이 불필요하다」는 뜻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생각해 보자. 우리는 왜 과거사를 비판하고 역사를 평가하려 하는가.
예를 들어 일제의 식민지지배에 대해 우리가 진정한 사죄를 요구하는 까닭은 그것이 우리 민족 자체를 없애려던 극악한 범죄행위였다고 보기 때문이다. 또한 지나간 독재정권들과 당시의 불법행위들을 비판하고 고발하는 까닭은 그것이 국민의 기본적인 권리를 빼앗고 민주주의적인 원칙에 어긋나는 시대적 악행을 포함하고있기 때문이다. 진실을 밝히고 사죄를 받아내며 억울한 일을 복원하는 등의 「청산」은 그래서 반드시 필요한 작업인것이다. 무엇보다도 다시 되풀이되어서는 안되는 역사이기에 그러하다고 할수 있다.
심상찮은 일들도 있다. 서울 한복판에서 일본의 한국지배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발언이 공공연하게 토로되는 모임이, 두 나라의 「지식인들」에 의해 주선되고 다시 옹호되는 현실을 본다. 지나간 군부독재시대를 정당화하고 미화하는 글이 대담하게 발표되는 수도 있다. 그 시절은 정말로 살맛나는 세월이었다는 식의 향수에 젖은 표현도 있고, 「가신 그 어른」을 추모하는 목소리들이 여전히 크게 들리고 있다.
이런 현실, 저런 목소리들이 반드시 청산되지않은 과거사 탓이라고는 하지 않겠다. 어차피 김정부는 「수구적 기득권세력과의 지배연합」이라는 점이 구조적이고 태생적인 한계라는 지적이 있어왔다. 그런 지적이 마음에 드는 표현이라고는 할 수 없겠으나, 「내부로부터 끊임없이 발목을 붙잡히는 개혁」을 볼때마다, 그리고 곳곳에서 시대역행적인 발언과 움직임이 나타날 때마다 그 「구조적 태생적 한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미래와 세계를 향하여」는 과연 옳은 방향일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문민정부가 그 목표를 더욱 당당하게 추구하기 위해서는 「어떤 미래, 어떤 세계인가」를 좀더 분명히 그려 보일수 있어야 할것이다. 덧붙여서 그 같은 미래를 향해 국민을 이끌어 가는 개혁의 중심세력이 「구조적 태생적 한계」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도 모색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대통령 혼자서 모든 일을 결단하거나, 대통령 혼자서 번번이 발목을 붙잡히거나 하는 방식으로는 21세기는 고사하고 가까운 미래도 내다 보기가 힘들것이다.
「통제불가능의 세계」로 21세기전야를 조망한 브레진스키에 의하면 『세계는 갈수록 우리의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변화의 속도에 휘말려 뛰고 있을 뿐인 상태가 된다. 그런상태가 우리의 미래를 만들고 있는것이다. 세계는 마치 로봇이 조종석에 앉은 비행기처럼 액셀러레이터만 계속 밟으며 정처없이 달리고 있는 꼴』이라고 한다.
21세기를 향한 수많은 예언과 전망들 가운데서도 「로봇이 조종석에 앉은 비행기」는 우리에게 더욱 시사적이다. 그 21세기는 냉전체제의 붕괴와 함께 이미 시작된 역사라고 할수 있다. 세계의 미래가 과연 어떤 모양으로 변할것인가, 그 미래에서 우리 나라가 어떻게 자리잡을것인가를 더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때이다.【본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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