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부사정 밝은 보고서 있었다”/“청문회 위증때 공분” 책쓰게돼/계획서 결재까지 5개월 소요/포기 각서받기 사전준비 완벽 언론통폐합의 현장체험을 폭로한 김기철씨는 자신이 언론대책반에서 통폐합방안을 입안하면서 출처를 알수 없는 수많은 메모를 받아 이를 취합했다고 말하고있다. 김씨는 이를「얼굴없는 통폐합방안」이라고 불렀다. 김씨는 또 자신의 체험을 책으로 펴내게된 동기를 88년에 있었던 언론청문회에서의 위증을 보고 공분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했다.
청문회에서 허문도씨(전청와대정무수석)는 언론통페합을 자신이 주도했다고 하면서 우리나라의 언론구조를 근본적으로 뒤바꿔버린 거대한 작업을 자신혼자서 했다고 강변했다. 그러나 언론통폐합의 현장을 구석구석 목격한 김씨는 보이지않는 조언자와 협력자가 언론계 안팎에 있었음을 분명히 하고있다. 김씨는 자신의 회고기에『당시 감을 잡기로는 언론계내외에서 몇사람이 조언을 했다』고 기술하고있다.
김씨는 이와함께 당시 언론대책반이 소속되었던 보안사 정보처장 권정달씨가 88년 언론청문회당시 미국에 피신해있으면서 기자들과 만나『통폐합같은 큰문제를 누구 혼자서는 못했을 것이고 주변에서 많이 도와주었을것』이라고 말했는데 이는 의미심장한 대목이라고 부연하기도 했다. 이문제는 언론청문회에서도 집중추궁되었으나 허문도씨를 비롯한 증인들의 일관된 부인으로 끝내 실체가 드러나지 않았다.
김씨는 자신이 통폐합방안을 취합하면서 참고했던「얼굴없는 통합방안」5건을 실례로 들기도 했다. 김씨는 5건중 2건이 같은사람에 의해 작성됐으며 이 인사는「언론계의 흐름」이라는 언론계내부사정에 대한 별도의 보고서를 내기도했다고 밝히고 있다. 언론계가 고도의 전문성을 지닌 집단임을 감안할때 이보고서가 언론계내부인사에 의해 작성됐을 가능성이 높음은 물론이다. 언론청문회때 80년당시 현직언론계간부와 언론학계 인사들이 언론통폐합에 깊숙이 개입했을것이라는 얘기가 끈질기게 나돌기도 했다. 그리고 여기에는 언론사간의 이익다툼도 영향을 미쳤다는게 정설로 돼있다. 사실 지방언론사의 경우 1도1사원칙에 따라 통폐합이 집행되는 과정에서 해당언론사의 로비력에 따라 통합의 주체가 바뀐경우가 드러나기도 했고 중앙언론사의 경우도 5개월여전부터 통폐합의 기미를 알아차리고 나름대로 살아남기위해 노력한 흔적이 많다.
서울경제신문의 경우만봐도 발행부수 13만부(유가부수 12만부)에 경제시장점유율 43%인 독보적인 경제지였으나 강제폐간당하고 사세나 발행부수가 월등하게 뒤떨어진 다른경제지 2개는 살아남았다. 언론통폐합이 이루어진이후 언론계의 판도가 크게 바뀌었음도 언론통폐합에 언론사간의 이해다툼이 끼여들었을 개연성을 뒷받침하고 있다. 신군부가 정통성없는 권력을 유지하기위해 단행한 언론통폐합의 과정에 출세지향적인 일부언론계간부가「밀고」형태의 조언을 했고 그틈바구니에서 일부언론사가 자사이익을 챙기려했다는 족적들이 어렵지않게 발견되고있는것이다.
이와관련해 신군부핵심이었던 한인사는『신군부는 갑자기 집권을 했기 때문에 이미 산업사회단계에 접어들었던 당시의 복잡한 사회에대한 구체적인 개혁프로그램을 미처 갖추지 못했다』고 전제한뒤『특수분야중 하나인 언론에 대해 내부인사들의 도움없이 무슨일을 할수 있겠느냐』고 말하고 있다.
이인사는『만약 언론계가 군부를 손본다고 할때 가장먼저 조언과 협력을 구할 사람은 바로 군부인사가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이동국기자】
◎김씨의 회고록 발췌
80년당시 언론대책반원 김기철씨의 회고기 발간을 계기로 그동안 감춰져있던 언론통폐합조치의 단편적인 진실들이 조금씩 그 실체를 드러내고있다. 다음은 김씨 저서에서 새롭게 밝혀진 사실들의 요약이다.
▷기획과 입안◁
전두환전대통령은 보안사령관겸 합동수사본부장에 있던 80년5월당시부터 벌써 언론통폐합을「있을수 있는 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김씨는 언론대책반에 있던 80년5월19일 전당시사령관의 친필결재사인이 들어있던「계엄보도통제지침」을 받는다. 여기에는 전씨 친필로「보도처 위반(위반을 잘못 쓴것으로 추정됨)시 폐간」이라고 쓰여있었다는 것. 김씨는 이에대해『한참 생각한 끝에 「이 지침을 위반할 때는 계엄사령부 보도처에서 위반 간행물을 폐간하라」는 지시인것을 알게 되었다』고 기술하고있다.
김씨는 또『언론대책반의 이상재반장(당시보안사령관 보좌관·현 민자당의원)으로부터 언론인 한사람 한사람의 완벽한 신상내용이 기록된 「언론인카드」의 분류요청을 받았다』고 밝혀 언론인 신상카드의 존재를 확인했다.
▷언론건전 육성방안◁
신군부의 언론통폐합조치는 80년6월부터 가시화된다. 김씨는 언론대책반에서 처음 성안한 언론통폐합관련 문서의 이름이 26장분량의「언론종합대책(안)」이었다고 말한다. 이를 상부보고용 브리핑자료로 요약해 재구성한 것이 10여장분량의「언론건전육성종합방안보고」였다. 그러나 이는 개혁주도그룹에서 언론통폐합에 관한 명확한 침로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 권정달당시 보안사정보처장의 사임을 계기로 유보됐다. 김씨는『넘어온 자료들이 모두가 순화건의, 순화방안, 정비대책등 부드러운 표현을 썼기때문에 나도 건전언론 육성이라고 표제를 달았다』고 밝혔다.
▷대통령 결재◁
언론통폐합계획의 입안부터 대통령결재까지는 5개월여가 소요됐다. 권처장은 80년9월께 김씨의「언론건전육성종합방안보고」를 청와대로 가져가 전대통령의 결재를 받으려 시도했으나 보류됐다.
그 뒤 이 문제는 청와대의 손으로 넘어가 허문도당시 정무비서관의 주도로 추진됐다. 허씨는 80년11월12일 이광표당시 문공부장관에게 부탁해 「언론창달계획」안으로 이름붙여진 언론통폐합계획서의 대통령결재를 받았다. 전대통령은 결재 4일전인 11월8일 청와대출입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통폐합문제에 대한 질문을 받고『글쎄, 필요성도 있긴한데 문제가 많단 말이야…』라고 말해 결재직전까지도 권부내에 이견이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하고있다.
▷집행◁
언론통폐합을 꾀하고 있던 세력들은 대통령결재 이전부터 주도면밀한 준비작업을 해오고 있었다. 김씨에 의하면 통폐합의 집행은「언론창달계획추진을 위한 언론사대표각서징구(금품이나 양곡등의 요구를 의미하는 보안사 용어)계획」이라는 긴 이름의 서면계획에의해 이뤄졌다. 이 계획서는 보안사의 언론사대표 소재파악 담당요원들의 이름, 각서징구담당관에 대한 소집교육일정표, 각서 징구장소 및 담당자와 후속처리 지침등을 자세히 담고있다. 또 유의사항으로 「지도급언론인이므로 최대한 예의표시, 각서 징구후 안내자가 정중히 배웅」등 까지를 상세히 기록하는등 치밀한사전준비가 완벽하게 돼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한편「본인은 새 시대를 맞아 국가의 언론정책에 적극 호응하여…」로 시작되는 언론사 사주들의 각서 초안은 당시 허만일문공부 공보국장이 각서징구 하루전에 급히 마련했다. 영문도 모르고 보안사에 간 언론사주들은 강압적인 분위기 아래서 불러주는 포기각서를 쓴뒤 지장을 찍었다.【신효섭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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