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자신의 삶을 영웅적인 높이로 끌어올리는 경로란 어떤것일까. 다시말해 인간 보편의 아름다움을 개별 인간이 지극한 경지까지 구현하는 길은 무엇인가. 여기에 일률적인 답이 있기는 어려울것이나, 적어도 모든 답이 죽음과 뗄 수 없이 관련되어 있을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개체의 죽음이라는 저 절대의 관문과 어떤 형태로건 대결하지 않고 구현되는 영웅성이란 상정하기 어렵다. 자기 소멸의 위기와 마주했을때, 비록 짧은 시간이나마 인간은 숙명적인 초라함을 빚고 크건 작건 위엄과 후광을 발하는데, 그것은 반드시 남성적인 기개와 호방함으로만 드러나지 않는다. 인간의 모든 선한 행위는 소극적이든 적극적이든 개인적·육체적 생존욕구의 유보, 즉 죽음의 자발적 수락이란 차원을 갖는것이며, 진리를 향한 어떤 형태의 구도행에건 따라서 금욕의 계율이 빠질수 없는것이다. 성삼문·황현등을 비롯하여 이육사·윤동주, 근년의 김지하·김남주에 이르기까지 민족사의 고통을 자신의 몫으로 수락했던 이들의 시에는 범하기 어려운 위엄이 서려있다.
사형선고와 함께 20대의 나이를 십여년의 옥살이로 보낸 문부식의 첫 시집 「꽃들」에는 통상 「영웅적」이라 할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의 시집속에는, 일반의 선입견과는 달리 사납고 거센 구석이라고는 아무데에도 없는것이다. 걸작인 「박장수」며 3, 4부의 노기어린 목소리들도 마찬가지지만 거세기는 커녕 <허나 벗이여 죽음은 대할수록 낯설고 청춘은 자꾸 죽음과 돌아앉으려 하는데 스물세 살짜리 젊음에게 도대체 조국은 무엇이고 죽음은 무엇이고 사랑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낙서」) <이 눈 밟고 가게 될 것인가 저기 낮은 담을 돌아 사형장으로 가는 길 위로 눈이 내린다 …… 철문이 열리고 잠시 머물던 독방을 나와 사형장까지 그 몸서리치게 짧은 길을 과연 나는 무슨 생각을 하며 걷게 될 것인가> (「눈 내리는 겨울밤에 쓴 마지막 시」)와 같은, 불가항력의 운명에 걷어채인 사람의 외로움과 두려움 사이의 애잔한 떨림들이 오히려 시집에는 가득하다. 그 떨림은 말할 수없이 맑고 여리며, 행여 감정이 넘쳐나올세라, 그는 운문의 형식적 단정함으로 자신의 시들을 빈틈없이 다스려내고 있다. 이 눈 밟고 가게 될 것인가> 허나 벗이여>
죽음앞에서의 이 투명하고 여린 비애와 떨림,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허물기를 허락지않고 있는 몸가짐의 정갈함을 감히 영웅적이라 말하는 것은 과한가? 참다운 힘의 한 모습이라고 말하는것은 과연 지나친 것인가? 우화를 빌려, 거울 외투를 벗겨내는것이 결국 물기어린 봄볕이라고 말하는것은 안이하고 패배주의적인가?
문부식은 쓰고 있다. <아직도 열쇠를 가지고 와서 옥문을 열어주는 사람은 없네 민주열쇠 통일열쇠 자주열쇠 가지고 와서> (「옥문열쇠」중에서). 이 시는 긴 울림으로 우리를 친다. 그 열쇠 기다려 목이 빠질 이들이 수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아직도 열쇠를 가지고 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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