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미술사의 거봉/추사 김정희 예술론 집대성/문·사·철 아우르는 넓은 안목지녀/절제와 파격 조화의 경지 “감동적” 조선후기 미술사를 전공으로 삼으면서 나는 수많은 위대한 예술가의 삶과 예술에 접할 수 있었다. 현실속에서 그림의 소재를 구하여 속화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해낸 공재 윤두서와 관아재 조영우. 조국강산의 아름다움을 화폭속에 구현하여 진경산수의 세계를 열어놓은 겸재 정선, 사대부적 기상과 문인적 심회를 붓끝에 의지하여 문인화의 이상을 전개한 현재 심사정과 릉호관 이린상, 이러한 예술적 성과를 모두 한몸으로 끌어안아 가장 조선적인 회화세계를 구현한 단원 김홍도.
그분들의 예술적 성취를 더듬어 보는 일은 마치 고산준령을 넘고 넘는 지리산 종주의 등산길과도 같아서 숱한 학문적 과제와 함께 문화적 위업에 대한 커다란 자랑과 기쁨을 느끼게 된다.
그 행복한 여정 속에서 나를 항상 괴롭히는 봉우리 하나는 추사 김정희이다. 수없이 등반해본 조선후기 미술사라는 산맥이었지만 나는 아직껏 추사 김정희라는 봉우리를 넘어보지 못했다.
그것은 너무도 가파르고 오롯하여 감히 오르지 못하고 다만 그 아랫자락을 맴돌아 우봉 조희롱과 소치 허유를 거쳐 오원 장승업에 다다르는 간편한 코스를 택하고 있다. 그러니까 추사 김정희는 나에게 있어서 그저 멀리서 바라보기만 할뿐 오르지 못하는 험준한 거봉일 따름이다.
내가 추사라는 거봉에 도전하지 못하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다.
첫째는 추사가 이룩한 예술적 성취란 나같은 풋내기 미술사학도가 쳐다보아 알 수 있는 그런 높이가 아닌것이다. 언제나 구름에 덮여 가늠하기조차 힘든것이기도 하다. 둘째는 그가 이룩한 예술이란 단순히 장인적 연찬과 수련속에서 성취한것이 아니라 고증학이라는 철학적 기반과 문·사·철을 두루 아우른 총체적 인식의 안목이 서려있으며 유학에서 선학을 자유로이 넘나들었고 북경과 한양을 오가는 광대한 폭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만으로도 힘든 일인데 내가 추사에게 도전할 장비란 한문이라는 서툰 언어뿐이었으니 비록 세상엔 그의 글을 모아 펴낸 「완당선생전집」이 있은들 그의 시와 논설과 편지를 꼼꼼히 읽어내며 연구할 재간이 없었던것이다. 오직 그중 화논과 서론만 선생께 의지하여 강독한 상태였다. 그러니 내 어찌 추사를 알고 논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근래에 민족문화추진회에서 작고하신 우전 신호열선생의 노력으로 「완당전집」(전4권)중 두권이 발간되어 그것을 읽을 수 있게 됨은 여간한 행복이 아니었다. 특히 제2권의 잡저는 추사의 예술론이자 예술철학적 단상으로 엮여 있다. 『그림의 이치는 선과 통하는 바, 길은 끊기려다 끊기지 아니하고, 물은 흐르려다 흐르지 않는다』고 선문답식으로 갈파한 것이나 『지붕밖에 푸른 하늘이 있으니 다시 보라』며 세계사적 지평에서 예술을 논하고 있는 점, 『가슴속에 오천권의 문자가 있어야만 비로소 붓을 들수 있다』는 엄격한 인격 수양론 같은것은 곧 추사라는 거봉에 도전하는 열쇠가 된다.
그리하여 추사는 『법도를 철저히 지키면서 또한 그 법도를 뛰쳐 나아갈 수 있을 때』 참된 예술을 획득할 수 있었다고 하였는데 나로서는 지키기나 뛰어넘기는 어렵지 않으나 「지키면서 뛰어넘는」 경지만은 아직도 구름속에 가려진 봉우리일 따름이다. 다만 한글본 「완당전집」을 읽고 또 읽어 어느 때인가 깨쳐지기를 희망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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