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개인전의 회장이라기 보다는 거대한 상설 미술전시장이다. 1층에서 3층까지의 전시실과 홀까지 합쳐 3천평을 가득 메운 1천2백여점의 작품량에서 우선 그렇다. 한 작가의 작품이 이렇게 많이 모일 수 없다. 게다가 전시된 작품이 여간 다채로운 것이 아니다. 그 많은 작품들의 세계가 시대마다 다르다. 도저히 한사람의 작품같지 않다. 지난 10월12일부터 30일까지 예술의전당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운보 김기창(운보 김기창)8순기념회고전」을 관람한 사람이면 이런 느낌이 들것이다. 이렇게 규모가 크고 다양한 내용의 개인전이 있어본적이 없다. 이 작품들을 이대로 고스란히 모은 상설미술관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1931년 18세때 선전에 처음 입선한 이래 60여년을 이어온 노대가 운보의 화업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의 화가로서의 성장과 변모가 일대기로 엮어져 있다. 이당 김은호의 문하생으로 출발하여 끊임없이 자기혁신을 꾀하면서 동양화의 전통적 기법과 양식의 개혁을 통해 새로운 한국화를 꾸준히 모색해온 역정이 일목요연하다. 첫 전시실의 세필은 마지막 전시실에서 봉걸레의 그림으로 끝난다. 붓의 굵기가 엄청나게 달라져 있다. 그냥 붓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 그 필세가 나이 들수록 역동해진다. 그가 창출한 한국화의 세계성은 놀랍다. 거침없이 시대를 축시하고 양의 동서를 축지하며 넘나든다. 그는 동서양의 현대미술사가 한 사람속에 다 들어있는 화가다.
전시실의 맨끝 그림은 그저 하얀바탕에 검은점 몇개만이 차츰 커지면서 찍혀 있다. 맨끝 점은 크기가 한아름이다. 설원을 멀리서 지나온 거수의 발자국 같다. 이것이 바로 거인 운보의 그림이 뚜벅뚜벅 걸어온 발자취다.
8세때 청력을 잃고 평생을 캄캄한 실음속에 살아온 사람의 울분 아니고는 도저히 분출될수 없는 화풍이다. 그만큼 유니크하다. 일생은 깊은 바다의 침묵이었고 그의 그림은 성난 파도가 그린것이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사람만이 가장 아름다운것을 발견할 권리가 있다. 8천점이 넘을것이라는 그의 총제작 작품량만 해도 남이 따를수 없는 눈물겨운 의지의 소산이다.
충북 청원군북일면형동리에 있는 「운보의 집」을 찾아간다. 입구에는 문기둥만 섰을뿐 대문이 없다. 늘 빨간 양말에 흰 고무신을 신고 뜰을 산보하는 그를 누구나 만날수 있다. 거소인 아담한 한옥은 그의 거구에 비해 안이 비좁다. 큰 그림은 곁에 딸린 운향미술관에서 그린다. 멧돼지, 사슴, 공작등 동물들을 많이 기르는것은 어차피 무언일바엔 사람보다 훨씬 정직한 이들과 대화를 하기 위해서다.
운보는 자신이 문이 없는 사람이다. 마음을 잠그는 법이 없다. 비밀이 없이 솔직하고 꾸밈이 없이 순수하여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놓는다. 허점도 약점도 감추지 않는다. 이 무사가 그의 예술을 대가로 키웠다.
운보는 『마음이 착하면 예술도 착하다』라고 말한다. 회고전을 가지면서 지나온 평생을 회고해보면 『나쁜 짓을 안했으니 내 인생은 그림만큼 아름다웠다』는 것이다.
광복전까지는 스승인 이당이 하라는 대로 그림을 그리다가 광복후 자신에 대한 작가적 자각이 생기면서 제일 먼저 스승에게 「예술적 반란」을 일으켰다고 한다. 완당은 서예도 추상화하는데 그림은 왜 못하나 싶어 추상 동양화를 개척했다. 끊임없이 변화해온 그의 예술의 실험정신은 종착점이 어디일까.
『출발점은 있어도 끝이 없는것이 예술이다. 한 작가가 예술의 도달점이 있다면 그것은 그 작가의 죽음을 의미한다. 작가는 무덤속까지 붓을 가지고 가야 한다』
한국화와 서양화의 차이에 대해 『나는 엄격히 구별 안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나는 무덤에 가서도 영원히 한국사람이지 서양사람은 안된다』는 말을 덧붙인다. 그는 언젠가 『가장 한국적인것이 세계적인것이다』라고 언명한 적이 있다.
한국의 거장 운보가 세계적인 거장의 반열에 못끼일 까닭이 없다. 한국에 화가가 있다. 서양화가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화가가 있다. 세계에 당당히 내놓을 한국적인 미술이 무엇인가. 운보의 회고전에 가보면 안다. 운보자신에게 스스로를 세계적인 작가로 생각하고 있느냐고 물으면 『나는 시인도 부인도 안한다』고 대답한다.
운보의 그림은 그동안 미국과 유럽에 몇번 나들이를 한적은 있다. 그러나 모두 단편적인 전시회들이었다. 편모만 가지고는 거대한 숲같은 운보의 세계를 모른다. 운보의 그림 한장 한장은 한 획에 불과하다. 총화를 액자에 끼우지 않으면 안된다. 세계의 유수한 미술관 관계자들을 이번 회고전에 초청했어야 옳았다. 한국에 화가 있음을 알릴 좋은 기회였다. 운보는 국내에만 가두어두기에는 너무 볼륨이 크다. 우리는 항상 제것에 무지하고 인정에 인색하다. 운보 자신으로서도 파리의 퐁피두센터 같은데서 대전시회를 갖는것이 여생의 소원이다. 지금까지는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절망의 나무가 자력으로 거목이 되었다. 이제부터는 귀 열리고 입 트인 사람들이 외쳐줄 차례다. 나라가 나서서 우리에게도 세계적 대가가 있노라고 자랑을 해야할 때다.【본사상임고문·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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