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 한양레퍼토리「유령」 사실주의연극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노르웨이 극작가 헨리크 입센. 그는 「인형의 집」으로 유명하지만 연극사적으로 볼때 소극장운동의 효시인 유럽의 「독립극단」운동을 주도했던 「유령」이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인형의 집」이 사회적 도덕률을 깨고 자기실현과 여성해방을 위해 남편과 자식들을 버리는 여인을 그렸다면 「유령」은 사회가 부과한 의무와 책임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욕망을 억제하고 가정을 지키다 파멸당하는 알빙부인의 불행을 그린다.
사실주의는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는 지극히 답답한 양식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삶을 일상에 가깝게 반영하는 까닭에 관객들이 접근하기가 매우 쉽다. 그런데 예술가들의 입장에서 보면 연극을 일상에 가깝게 만든다는것이 결코 녹녹한 일이 아니다. 무대가 곧 생활현장이기 때문에 그 위에서 펼쳐지는 삶에 한치의 거짓도 있어서는 안된다. 배우들은 네개의 벽이 다 있는 방에서 진짜로 살고 관객들은 연출가가 마지막 순간에 허물어준 어느 한쪽 벽을 통해서 그들의 삶을 훔쳐본다는 이른바 「제4의 벽」개념이 실현되어야 한다.
극단「한양레퍼토리」의 이번 공연(11월3일까지 충돌1소극장)은 사실주의 연극만들기의 기본과제인 「제4의 벽」을 실현하는데 미흡했다. 배우들이 아직 전체적으로 어린 탓이겠지만 서로의 관계안에 머무르면서 주어진 상황에 충실한 채 내면의 목표를 추구하지 않고 자주 관객쪽에 시선을 돌리면서 감정을 전달하려고 애쓰는 모습이었다. 특히 알빙부인한테 여자로서의 책임과 의무만 강조하는 만데르스목사역의 중견배우 박용수는 그녀의 자유주의적인 신사고에 위선적인 분노만 표현할뿐 아직도 그를 사랑하는 그녀에 대해서나 또는 은밀하게 그녀를 원하고 있는 자신에 대해서는 배려가 부족했다.
알빙부인역의 최형인은 죽은 남편의 방탕때문에 선천적으로 병을 얻어 죽어가는 아들 오스왈드(신용욱)와의 장면에서는 아들의 고통과 실패한 어머니로서의 자기인식 사이를 오가며 극중인물 안에 충실히 머물렀지만 만데르스목사한테 그녀의 불행했던 결혼생활을 상기시키는 전반부의 장면에서는 그 오랜 수모와 고통을 참아온 여인의 강인함보다 자신이 겪은 불행에 눈물을 흘리는 감상을 보였다. 신용욱은 오랜 외국생활 끝에 돌아온 예술가, 극도의 피로에 시달리는 죽음이 임박한 환자라는 주어진 상황을 자주 이탈했고 하녀이며 이복동생인 레지네역의 송경희와 그녀의 의붓아버지 한정국은 본심을 너무 쉽게 노출시키면서 대사의 속뜻(서브텍스트)을 자주 포기했다.
과거의 유령이 지배하는 삶의 환희가 없는 숨막히는 공간을 갈색의 모노톤으로 처리한 신일수의 무대미술과 변창순의 의상은 적절했다. 경박한 희극이 판치는 대학로의 문화회생을 위해서 진지한 연극의 빈도를 좀더 높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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