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들갑이 부끄럽다. 우리 사회의 수준이 어디쯤 닿고 있는지 그대로 드러났다. 역시 우리는 여러모로 후진국수준이다. 침몰한 여객선의 선장은 결국 선실안에서 숨진채 발견됐는데, 그런 선장을 두고 「살아서 달아났다」는 맹랑한 헛소문이 퍼져 한동안 세상이 떠들썩했던것이다. 검찰은 떠도는 소문을 토대로 지명수배에 나서는등 수사력을 집중했고 경찰은 병력을 풀어 인근 섬들을 토끼몰이식으로 훑었으며 언론은 냉정을 잃은채 「생존선장」을 찾아서 덩달아 춤을 췄다.
선장의 생존설은 처음부터 믿을 수없는 거짓이거나 착각이었으나 검찰과 경찰, 그리고 언론까지 한묶음이되어 뜬소문에 놀아난 꼴이었다. 이것은 단순한 착오나 우연으로 잊고 넘길 일이 결코 아니다. 우리 사회에 내재한 후진성과 모순에 대한 엄격한 검증이 필요하다. 이 상태로 어물쩍 지내면 화근을 놔둔채 겉의 상처만 꿰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눈에 안보이는 병인을 정확히 짚어 내야 또 다른 고통을 미리 막을 수 있다.
우리는 생각과 행동이 성급하고 비합리적이다. 특히 놀라운 사건이나 대형사고가 닥치면 냉철한 상황판단없이 우왕좌왕 뇌화부동이 심하다. 큰 소리는 칠줄 알아도 성숙감이 모자란다. 「살아 있는 선장」은 우리의 이러한 전근대성을 상징하는 헛개비였던 셈이다.
검찰이 선장의 생존을 확신하고, 경찰이 수색에 나서고, 언론이 추측을 확대재생산하는 사이 그 누구도 선장가족들의 곤혹과 고통을 거들떠 보지 않았다. 차마 입밖에 표현할 수 없는 이중의 아픔을 가족들은 겪은 셈이다.
서해 훼리호 침몰참사는 사고가 난지 1주일이 지나도록 뒤처리가 어지럽다. 모두가 자기 중심을 잃고 파도에 밀린듯 휘청거린다. 선장의 생존설소동은 사고수습이 갈수록 만만치않은 일임을 말해주는 사례이기도하다. 조급하게 사고원인을 캐내려다가 자칫 엉뚱한 「주검」에 책임이 돌아갈뻔 했던 이 소동의 책임을 언론도 통감한다.
자체검증의 능력과 합리성에 익숙했다면 이런 「희극 같은 비극」은 일어날 까닭이 없다. 사고는 예방이 최선이다. 그러나 피할수 없이 사고가 났다면 침착과 냉정한 사후수습이 또 중요하다. 헛소문이나 유언비어를 함부로 퍼뜨림은 불신을 증폭시키고 혼란을 야기할 따름이다. 따지고 보면 사고의 원인이나 수습과정이 휘청거리는것은 우리들 의식의 후진성 탓이다.
인양작업이 거의 마무리 되는 단계에서 이번엔 헷갈리는 실종자의 수 때문에 후유증이 예상된다. 그럴수록 섣불리 덤비지 말고 신중하게 대처함이 바람직하다.
지금 우리사회에 팽배한 조급성과 감정우위의 비합리성은 시급히 청산되어야 할 과제이다. 선진이 무엇인가. 그것은 의식의 성숙이 전제되어야 한다. 선진을 서두르기보다 후진탈피가 더욱 절실하다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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