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년 쿠데타저지 3총사로 “한배”/피의 대결… 생사 옐친손에 달려 91년8월 러시아최고회의 의사당 건물앞. 보리스 옐친러시아대통령은 포신을 의사당으로 향한 쿠데타군의 탱크위로 올라갔다. 『의회 사수』를 외치던 옐친 곁에는 백만원군 같은 두명의 거물이 핸드마이크를 든채 버티고 서있었다. 루슬란 하스불라토프최고회의제1부의장과 알렉산드르 루츠코이부통령. 세사람은 한몸처럼 움직이며 시위대를 지휘, 군부쿠데타를 저지하는데 성공했다.
그로부터 2년2개월만인 지난4일. 하스불라토프의장과 루츠코이부통령은 또다시 핸드마이크를 들고 의사당건물 발코니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들은 시위대를 향해 『옐친타도』를 외쳤고 옐친은 두사람을 겨냥한 정부군 탱크에 발포명령을 내렸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고 영원한 동지도 영원한 적도 없다는 냉엄한 정치생리가 현실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옐친, 하스불라토프, 루츠코이. 세사람의 악연은 90년3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러시아최고회의 의장에 선출된 옐친은 하스불라토프를 자신의 오른팔격인 제1 부의장으로, 루츠코이를 인민대표대회내 개혁파지도자로올려놓았다. 모스크바 플레하노프대학의 경제학교수출신인 하스불라토프는 전면적인 개혁과 개방을 주장하는 옐친노선에 없어서는 안되는 인물이었다. 또 아프가니스탄 전쟁영웅 루츠코이는 군부와 공산주의자, 민족주의자들을 개혁물결에 동참하도록 설득하는데 적격인 인물이었다.
91년6월 보수파가 옐친을 제거하려하자 하스불라토프와 루츠코이는 대통령직선 카드를 내세워 옐친을 첫민선대통령으로 밀었다. 옐친도 군부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루츠코이를 부통령후보로 낙점,환상의 「러닝메이트」를 이뤘다. 그리고 1등공신이된 하스불라토프를 최고회의의장으로 천거했다 그러나 보수파의 반대로 제1부의장에 머물렀다.
두달뒤 보수파의 쿠데타가 일어났고 세사람은 맨몸으로 쿠데타군 탱크위에 올라 명실상부한 「의회수호 삼총사」로 활약했다. 쿠데타위기를 넘긴 옐친은 드디어 하스불라토프를 최고회의의장으로 올려놓는데 성공했다. 옐친으로서는 3년 이상 노력해온 권력기반이 확고해지는듯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이 시점을 고비로 세사람의 정치적 운명이 악연으로 바뀔줄은 어느 누구도 점치지 못했다. 의회를 장악한 하스불라토프는 점점 의회내 민족주의, 공산주의, 보수세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옐친의 후원이 없었으면 결코 의장직에 오를수 없었던 하스불라토프였지만 의회수장으로서 그는 의회내 보수파를 무시할수 없었다. 하스불라토프는 소수민족인 체첸족 출신이다. 옐친과 대권을 다툴수 없는 인종적 약점때문에 그는 정치생명을 의회에 걸었다.결과는 사사건건 옐친의 개혁정책에 대한 제동으로 나타났다. 루츠코이 역시 옐친행정부내에서 젊은 개혁주의자의 견제에 밀려 권력의 핵에서 멀어져갔다. 어찌보면 옐친 스스로가 군부의 신망을 얻고있는 루츠코이를 견제하기 위해 그를 점차 소외시킨것으로도 볼수 있다.
세사람의 갈등은 92년초 옐친이 젊은 예고르 가이다르를 부총리로 임명하면서 첨예화됐다. 과거에 믿었던 동지들에 의해 옐친의 기반은 약해졌고 결국 92년말 옐친은 가이다르를 경질해야하는 수모를 겪었다.
그리고 1년도 안돼 옐친과 두사람은 사생결단의 승부를 벌였다. 옐친은 승리했고 패배한 두사람은 모스크바의 전KGB감옥인 레포르토보교도소에 수감됐다. 침대등 시설과 식사는 물론, 이들은 담배도 피울수 있을만치 대우는 수준급이다. 옛동지들에 대한 옐친의 배려인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하스불라토프와 루츠코이는 수감된 뒤에도 일반잡범과 별도의 독방을 쓰고 있고 죄수복대신 체포당시 옷을 그대로 입고있다고 한다.
두사람은 일단 형법 79조와 122조에 의거, 대중선동죄로 최소 2년에서 15년의 징역형을 받을 수 있다. 옐친은 이들에게 사형까지 선고할수 있는 국가반역죄를 적용하는것도 고려하는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옐친이 이들과의 인연을 그렇게 쉽게 끊을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두사람의 반역죄 입증여부도 불투명하고 옐친이 끝까지 피의 숙청을 감행할 경우 얻는것보다는 잃는것이 더 많다는 정치적 계산 때문이다. 정치는 항상 인연을 복잡하게 만든다.【원일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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