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년 10월4일. 보리스 옐친러시아대통령은 최고회의(상설의회)건물에 정부군을 투입해 수많은 사상자를 낸 끝에 보수파의 항복을 받아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정부군의 탱크포격으로 화염에 휩싸인 의사당 옥상 시계탑의 바늘은 상오10시4분을 가리킨 채 멈췄다.
세계언론들은 지난 3∼4일의 유혈사태를 실패한 「제2의 볼셰비키혁명」이라고 일컫는다.
역시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레닌의 볼셰비키혁명 거사일은 1917년 10월25일이었고 혁명군에 의해 케렌스키임시정부가 항복한 것은 다음날인 26일 저녁이었다.
10월이란 달과 이틀간 계속된 유혈사태가 오늘의 상황을 닮았다.
볼셰비키혁명후 레닌은 총선거를 통해 제헌의회를 구성했으나 볼셰비키가 다수를 차지하지 못하자 이듬해 무력으로 의회를 해산했다.
레닌은 혁명후 비러시아인등 소수민족의 자결권과 분리독립권을 인정한다고 약속해놓고는 정작 우크라이나가 독립을 선언하자 군대를 파견, 우크라이나공을 무너뜨려 버렸다.
순서가 다르기는 하나 옐친은 최고회의를 무력으로 해산했고 새로운 의회의 상원격인 각 지역지도자로 구성된 연방평의회를 소집하려 하고 있다.
또 오는 12월12일에는 하원인 「두마」선거를 강행할 채비를 갖추고 있다.
옐친은 이러한 정치일정을 추진키 위해 독립국가연합(CIS)소속 각 공화국과 지역에 자치권과 경제적 권리행사를 확대한다는 약속을 해놓고 있다.
혁명후 볼셰비키정권은 경제파탄과 가혹한 독재정치에 불만을 품은 우파의 봉기에 직면해 적군과 백군으로 나뉘어 1918년부터 1921년까지 내전을 치렀다.
의회를 제압한 옐친은 지역의 반발세력을 무마하고 공산주의자와 극단민족주의자들의 국민봉기선동을 막는 한편 경제위기를 극복해야 하는 화급한 과제를 안고 있다.
레닌은 혁명동지였던 트로츠키로부터 배신을 당했으며 케렌스키임시정부총리의 뛰어난 언변에 시달려야 했다.
91년 구소보수파의 쿠데타를 막은 옐친과 루츠코이부통령은 한때 동지였으나 적으로 변했고 하스불라토프최고회의의장은 빼어난 말 솝씨와 명쾌한 이론으로 옐친의 개혁에 제동을 걸었다. 역사의 반복을 보는듯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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