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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장갑/박용배 본사통일문제연구소장(남과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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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장갑/박용배 본사통일문제연구소장(남과북)

입력
1993.10.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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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9년 10월1일에 모택동은 천안문발코니에서 선언했다. 『중국 역사상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4억7천만 중국인은 굳건히 나갑시다』 44년전 중국 국경절을 돌아보며 새삼 모에게 공산혁명의 성공을 가르쳐준 레닌을 생각케 된다. 레닌은 『왜 볼셰비키 지하당 조직은 부랑자, 범죄자가 우글거리느냐』는 질문에 답했다. 『우리의 조직은 거대한 사업입니다. 우리는 걸레같은 자도 이용할수 있어야 합니다. 혁명은 더러운 사업입니다. 흰장갑을 끼고 혁명을 성공시킬 수는 없어요』

 그래선가  모는 혁명을 성공시키기 위해 걸레같은 검은장갑 낀 자를 자주 사용했다. 그중 대표적 인물이 강생이다. 『추잡한 계략으로 모택동의 신임을 받은 우두머리』(로스 테릴의 「모택동」).  은테안경을 낀 교사타입의 검은 중국복을 즐겨 입고 웃지만 눈은 차가운 모의 보안책임자. 해리슨 솔즈버리(「새 중국황제들」의 저자)는 미국의 존 포스터 덜레스국무장관과 생김이 비슷한 인물로 표현하고 있다.

 강생은 산동성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1925년 공산당원, 32년 모스크바 유학, 그곳에서 소련의 KGB와 연결되어 코민테른에 몰려오는 외국공산주의자들이 독일이나 일본의 「특무」(첩자)인지를 가리는 일을 배웠다. 

 그는 모에게 정보만 전하고 검은장갑노릇만을 한게 아니고 강청을 비롯, 숱한 섹스파트너를 바쳤다. 수천의 에로소설과 춘화도를 수집해 준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화대혁명때는 유소기, 등소평, 심지어 주은래까지도 수정주의자로 몰아간 중국정치의 「25년간 음모자며 조작의 선두」였다.

 그는 77세때인 75년 모보다 1년전에 죽었지만 80년 당에서 축출됐다. 살아 있었다면 공식장례를 치르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중국의 양심적 혁명가만 모함한 것이 아니었다. 새삼 그를 들먹이는것은 비록 중공당 편에 섰지만 항일을 함께 한 한국인마저 그의 손에 죽었기 때문이다.

 요즈음 꽤나 서울에서 읽히고 있는 님 웨일스의 「아리랑」, 이회성·수야직수등이 엮은 「아리랑 그후」에는 그의 첫 한인희생자의 일생이 가슴 아프게 쓰여 있다.

 님 웨일스는 「중국의 붉은 별」의 저자 에드거 스노 부인(49년이혼)으로 1937년 연안에서 장지락(1905∼37년)이라는 한국인을 만난다. 그곳 군정대학 선생으로 있던 장은 그의 인생을 22차례나 그녀에게 실토한다. 그녀는 41년에 「아리랑」이라는 제목으로 그가 나라를 잃고 찾으려는 파란만장의 생을 영문으로 펴냈다. 그의 본명을 김산이란 주인공으로 바꾸고서였다.

 강생은 38년께 모스크바에서 트로츠키파와 일본스파이를 잡는 방법을 배워 연안으로 돌아왔다. 장지락은 30년11월 북경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31년4월 고국에서 석방됐다. 다시 북경에서 33년4월 그는 이번엔 국민당 경찰에 잡혀 고국으로 추방되었다가 이듬해 다시 중국으로 갔다.

 강생은 그에게 일경과 국민당 손에서 짧은 시간안에 석방됐다는 이유를 들어 「특무」와 「트로츠키분자」라는 죄목을 붙여 처형했다. 그는 광주 콤뮨(1925년)의 참가자며 중국인 국적을 얻었고 중공당원이었다.

 장지락만이 강생의 희생자가 아니었다. 연변자치주 당위서기, 첫 자치 주장이며 길림성 부성장이던 주덕해(본명 오기섭)도 마찬가지였다. 그에게는 강생을 37년1월 모스크바교외 쿠치노학원(동방노동자대학 후신)에서 만난것이 불행의 시초였다.

 그때 북만 녕안현 벌리허의 책임비서였던 그는 중공당소속으로 소련에 갔다. 이 학원의 보안책임자는 강생이었다. 그가 34년 서대림자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5명의 동료를 잃고 혼자 살아남은것이 조사대상이었다.

 강생은 신문했다. 『왜 혼자만 살았느냐』 『원인은 아주 간단합니다. 적들이 내가 오기섭이라는것을 알아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강생은 70년대에는 문화대혁명 지도소조(조장 강청)부조장으로 있었다. 연변자치주 주장이었던 그는 주은래노선을 따르는 「자본주의 길로 나가는 집권파」 수정주의자로 지목됐다. 심사에 나선 강생은 그를 평했다. 『이 사람은 모스크바에 있을때부터 태도가 좋지 못했다』고. 그는 72년 7월 폐암으로 주은래에게 청원중 사망했다.

 강생이 죽은후 문화대혁명도 끝났다. 장지락의 유일한 아들인 고영광(56·북경 국가기획위원회 근무)은 78년에 아버지의 명예회복을 당에 요청했다. 83년 그의 사후 45년만에 중공당(그때 주석 호요방)이 밝힌 그의 혐의는 강생의 조사와 전연 달랐다. 일제의 재판기록은 『그를 변절하지 않는놈』이라고 했다. 국민당의 서류는 『아무것도 자백하지않는 미련한 놈』이라고 되어있었다.

 혁명을 성공시키기 위해 흰장갑을 검은장갑으로 바꾸는것이 어떤 비극을 낳는지를 강생의 행위에서 찾아볼수 있다.

 남에서는 개혁, 북에서는 「우리식 사회주의 혁명」을 계속 부르짖고 있다. 남에는 강생같은자가 없을까. 제발 북에서는 강생같은자가 수두룩하기를 바란다. 그래야 수령과 지도자의 유일체제는 그런자 때문에 무너지게 될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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