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개재산 대법관들중 최하위/법률용어 한글화에도 큰 기여12대 대법원장으로 지명된 윤관대법관은 원칙과 법적 안정성을 중요시하고 법치주의 확립에 강한 집념을 가진 법관의 전형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법의 테두리내에서 법문해석에 충실하고 법의 자의적 해석을 몹시 싫어하는 그의 성향은 법과 미비를 사법부가 판결을 통해 적극적으로 보완해야 한다는 이른바 사법적극주의론자의 대표격인 이회창 감사원장의 성향과 대비를 이루면서 우리 법원내에서 큰 흐름을 형성해왔다.
이같은 그의 성향은 노동조합 대표자의 단체협약 체결권을 제한하는 단체협약은 무효라는 93년 4월의 대법원 판결에서 노동조합의 자주성과 민주성을 강조하는 입장에 서서 반대의견을 표명한데서 잘 나타나 있다.
시골 농부를 연상케하는 소박한 외모를 지닌 윤 대법원장 지명자는 후배 판사실에 수시로 들러 『차나 한잔하자』며 대화를 나눌 만큼 격의없고 자상하기 이를데 없지만 일에 관한한 철두철미한 원칙주의자로 유명하다.
또 한번 소신을 세우면 절대로 굽히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그는 지난 89년 10월 이회창 감사원장의 뒤를 이어 중앙선관위원장으로 임명된후 지방의회 의원선거,14대 총선,14대 대선 등을 치르면서 여야를 불문하고 선거법 위반행위에 엄격한 제동을 걸어 선관위의 위상을 제자리로 돌려놓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62년 광주지법 순천지원 판사로 법관생활을 출발한 이래 「아무리 작은 사건도 큰 사건처럼 판결해야 한다」는 소신으로 기록을 한장한장 꼼꼼히 살피는 부지런함으로 후배 법관들의 귀감으로 회자되고 있다.
청렴법관의 대명사로 통하기도 하는 윤 대법원장 지명자는 사법부 재산공개때 아들 2명의 재산 2억1천만원을 포함해 5억3천여만원을 신고,대법관중 최하위를 기록했지만 법원 체육행사 등에 1백만∼2백만원을 선뜻 희사할 정도로 따뜻함을 지녔다.
86년 전주지법원장에서 대법관으로 영전,서울로 이사할 때는 집을 구하지 못해 전주지법 직원들이 전세집을 구해준 일화도 있다.
판사생활의 대부분을 광주,순천,장흥 등에서 보낸 대표적 향판출신으로 고시 10회 동기생중에서는 처음으로 대법관에 임명됐고 88년 이일규 대법원장체제 출범과 함께 재임용됐었다.
민·형사사건에 두루 능통한 것으로 평판이 높고 특히 법률용어 한글화에 관심을 기울여 「우리말 바로쓰기」라는 소책자를 냈고 「신형법각론」을 펴냈다.
전남 해남출신으로 고산 윤선도의 12대 후손이며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영원한 법조인의 귀감 가인 김병로선생에 이어 36년만에 탄생한 호남출신 대법원장이란 의미도 크다.
서울형사지법 부장판사를 지낸 윤전변호사가 친동생이며 장남 준씨(32)도 춘천지법 판사로 재직중이다.<김승일기자>김승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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