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탄 경제회생 위한 구국결단” 명분/서방지원군부민심이 “운명 가름”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이 21일 최고회의와 인민대표대회의 해산 및 조기 총선실시라는 초헌법적 포고령을 발표하면서 러시아는 보혁세력간에 최악의 대결국면을 맞았다.
옐친은 이날 하오 8시(한국시간 22일 상오 1시) TV를 통해 현재의 정국위기를 타개키 위해 「극약처방」을 할 수 밖에 없었다고 이 조치의 배경을 설명했다.
그의 말대로 러시아의 보혁대결은 이미 한계점에 다달아 일촉즉발의 긴장상태에 있었다.
옐친의 초헌법적 포고령이 과연 성공할지 아직은 속단키 어렵다.
옐친은 개혁의 최대 걸림돌인 최고회의와 인민대표대회를 없애는 대신 각 지역 지도자들로 이루어진 연방평의회를 상원으로 하고 총선을 통해 새로 선출되는 의원들로 하원을 구성,양원제의 입법부를 만든다는 복안을 갖고 있다.
또 신헌법을 채택해 명실상부한 새로운 러시아로 재탄생시키겠다는 구상을 추진해왔다.
그러나 옐친의 조치가 민주적 절차를 정면으로 무시했다는 점에서 「설득력의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현행 헌법으로는 대통령이 의회의 승인없이 이런 조치를 내릴 수가 없게 돼있다.
알렉산드르 루츠코이 부통령과 루슬란 하스불라토프 최고회의 의장은 옐친의 의회해산조치를 쿠데타로 규정하고 절대 승복할 수 없다고 정면대결 자세를 취하고 있다.
물론 옐친은 의회나 보수파가 어떤 대응을 할지에 대해 면밀한 계산을 끝낸 것으로 보인다.
개혁을 성공시키고 러시아를 경제파탄의 상태에서 회생시키기 위해서는 달리 방법이 없는 불가피한 구국의 결단이었다는 호소로 서방세계와 러시아 국민대중의 지지를 확보하려 하고 있다.
서방세계의 지원과 함께 국내 민심동향이야말로 옐친이 던진 승부수의 운명을 가름할 최대변수이다.
러시아 국민들은 정치권의 보혁대결에 염증을 느끼고 있는 상태이며 악화일로의 경제상황 때문에 정치가 하루빨리 안정을 찾기만을 기대하고 있다.
지난 4월 국민투표에서 승리한 옐친은 국민들이 자신에게 등을 돌리리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으며 TV 등 매스컴을 장악하고 있는 이상 여론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끌어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다.
또 세계 각국도 91년 구 소련 당시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민주세력의 앞장에 섰던 자신을 지지했듯이 이번에도 러시아 민주주의의 보루인 자신을 지원해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렇더라도 루츠코이나 하스불라토프 등 헌법 수호세력들이 법절차를 완전히 무시한 옐친에게 쉽사리 승리를 안겨주지는 않을 전망이다.
최고회의는 즉각 루츠코이를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선출했으며 옐친으로부터 대통령의 권한을 전면 박탈하는 결정을 내리는 등 결사항전 태세를 취하고 있다.
하스불라토프는 또 모든 군대와 경찰에 옐친 대통령의 명령에 불복종하고 모든 노동자들에게도 파업을 벌일 것을 촉구하고 나섰다.
강경보수파들은 군부 등 물리력을 동원해서라도 옐친에 맞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상황인 만큼 가장 중요한 변수가 바로 군부동향과 민심향배가 아닐 수 없다.
옐친은 며칠전 모스크바 근교의 군부대를 방문,충성도를 마지막으로 점검해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군부내의 결속력은 크게 이완되어 있는 상태이며 따라서 자칫 군부가 두파로 나뉘어 유혈사태까지 벌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또 이번 사태의 와중에서 러시아연방을 구성하고 있는 각 지역 및 자치공화국들의 동향도 주목된다.
그것은 과거 역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모스크바가 분열되면 각 지역이 따라서 크게 흔들렸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연방붕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까지 상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옐친은 이미 더이상 물러설데가 없는 마지막 도박을 시작한 셈이다.
옐친이 과연 이 도박에서 최후의 승리를 거머쥘 수 있을지는 현재로선 가늠해보기조차 어렵다.
구 소련 붕괴이후 세계가 새로운 질서로 재편되는 과도기인 만큼 러시아의 장래가 어떻게 결정될 것인지는 향후 국제정치구도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칠 큰 변수로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모스크바=이장훈특파원>모스크바=이장훈특파원>
◎정부반응/「옐친지지」 공식논평 유보/한러 현안 지연 불가피
정부는 옐친 러시아 대통령의 의회해산 포고령에 대해 공식논평은 일단 자제하면서도 조심스럽게 「옐친 지지」 의사를 표출하고 있다. 정부는 이와함께 러시아의 이번 사태가 장기화될 것으로 보고 한러간의 제반 현안에 대한 새로운 검토에 들어갈 방침이다.
외무부 당국자는 22일 『제반상황이 불명확한 관계로 현 단계에선 논평을 하지 않겠다』면서 『좀더 사태추이를 살펴보고 관계국가들과 의견조율을 거쳐 우리 입장을 밝히겠다』고 말했다. 이 당국자는 이어 『이번 사태로 한러관계가 크게 영향을 받지는 않을 것』이라면서도 『양국간에 외교적 절충이 필요한 현안들은 시기적으로 연기가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현재까지 우리 정부는 러시아의 정정이 일단 옐친에게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외무부 관계자가 밝힌 이같은 판단의 근거는 ▲옐친에 정면으로 반대하고 나선 최고회의나 헌법재판소측이 자신들의 결정을 이행할 유효한 수단을 갖고 있지 않고 ▲군이 중립을 표명한 가운데 이들을 제어하는 국방·보안·내무부장관이 대통령 지지의사를 밝혔으며 ▲옐친 대통령이 그동안 연방평의회에 참석해 지방정부의 동의를 이미 구해놓았다는 점 등을 열거하고 있다. 이와함께 현지 우리 대사관에서 들어온 보고에 의하면 국민들의 반응이 옐친 대통령에게 불리하지 않다는 것이다. 즉 현재의 개혁정책을 대다수의 국민이 지지하고 있으며 옐친 대통령의 「초법적 포고령」에 대응한 최고회의의 「새 대통령 임명」 역시 위헌이라는 인식이 넓게 퍼져가고 있다는 대목이다.
정부가 이같은 상황판단에도 불구하고 「논평유보」의 입장을 취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러시아와 한반도간의 미묘한 관계 때문. 외무부의 고위당국자는 이와관련,『러시아의 개혁이 실패로 돌아갈 경우 그 경직의 여파가 제일 강하게 부딪칠 곳은 한반도이며 가장 큰 피해당사자는 우리가 될 것』이라며 『따라서 우리 정부로서는 상황을 예의주시할 수 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한편 정부는 한러간의 현안들이 다소 장기화될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의 양국 현안은 ▲30억달러의 경협차관 ▲KAL기 피격보상 ▲정동 러시아공관 부지반환 ▲오호츠크해 공해상의 우리 어선 조업문제 등 네가지로 어느 하나 뚜렷이 해결된 것이 없다. 특히 30억달러의 경협차관은 러시아측이 원리금 상환을 연체하면서 지급 유예까지 원하고 있는 상황에서 오는 10월에 이를 해결하기 위한 양국간 실무협상이 열릴 예정인 만큼 당분간 해결을 위한 논의 자체가 무망한 것이다.
정부는 「상황에 의한 유예기간」을 짧아야 8,9개월 정도로 잡고 있다는 것 같다. 옐친 대통령이 이번 포고령에서 12월 총선거를 선언한 만큼 자신의 대국민 신임을 재확인케 되는 대통령선거까지는 그만한 시기가 소요될 것으로 짐작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번 사태에서 옐친이 실각할 경우 이같은 「시간의 유예」는 그 자체가 무의미해질 우려가 있음은 자명하다.
이같은 형편에 비추어 볼때 우리 정부의 「옐친 지지,그러나 논평유보」는 고심끝에 나온 결론으로 보여진다. 이날 「논평유보」를 발표한 외무부 당국자는 『미국과 프랑스 영국 등이 이미 옐친 지지를 밝혔고 스웨덴과 우크라이나도 지지성명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도 『EC의 성명이 나오고 아시아 주요국들도 논평을 하게 될 때까지는 좀더 상황을 파악해봐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정병진기자>정병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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