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물관리 전문가로 지금은 작품활동에 전념하고 있는 친구가 찾아와 어려운듯 부탁을 했다. 현재 국립박물관인 구 총독부 건물을 없앤다는 것은 찬성하나,유물을 임시 장소로 옮기면 가장 자랑스런 민족유산이 훼손될 가능성이 높으니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새 박물관부터 짓고 현재의 박물관을 허물자는 건의에 교수들의 서명을 얻고 싶다는 이야기였다.일제하 36년이라는 민족적 치욕에 대해 조그만 감각이라도 가진 사람들에게는 구 총독부 건물이 아직도 서울 중앙에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이 결코 유쾌한 일일 수 없다. 따라서 새 국립박물관을 지어 조상들의 얼이 담긴 문화유산을 옮기고 구 총독부 건물을 헐겠다는 대통령의 결정에는 국민의 다수가 찬성했다. 유물의 관리 등 박물관의 핵심적 기능에는 손상이 가지 않도록 정부 당국이나 박물관 관계전문가들이 적벌한 조치를 할 것이라는 믿음과 기대가 구 건물 철거에 대한 지지의 밑바닥에는 당연히 깔려 있었다.
역사학을 전문으로 하는 나로서는 총독부 건물을 없앤다고 역사가 지워지는 것이 아닌데 멀쩡한 건물을 일부러 헐어버린다는 것이 필요한가 하는 회의가 있었지만,민족감정에 심히 거슬리는 건물을 헐고 대신 새 박물관을 지을 수 있을 만큼 우리의 힘이 자랐다는데 대해 느끼는 흐뭇함으로 그 회의를 눌러버렸다. 그러나 새 박물관을 언제 어떻게 건립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전혀 계획이 서있지 않은 상태에서 유물을 마치 쓰던 살림살이처럼 창고에 넣어 보관하고 박물관 건물부터 허문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박물관 관계전문가들과 정치지도자들의 책임감이나 안목만을 믿고 가만히 있을 때가 아니고 유물 보호에 대한 관심과 우려를 적극적으로 표명할 시기라고 느꼈다. 마침 교수회의에 참석하러 가던중인 나는 취지문을 회의중에 돌렸고 그것을 받아 본 많은 분들이 서명을 했다. 사회과의 젊은 교수 몇분은 자기들이 먼저 했어야 할 심부름을 서양사쪽의 나이 든 내가 하게 되었다고 미안해하며 취지문을 많이 복사해서 자기들이 적극적으로 서명을 받겠다고 자원했다.
해괴한 사태가 벌어지기 시작한 것은 그 다음날부터였다. 서명을 받으러 나섰던 한 교수는 즉각 철거를 주장하는 어느 「애국적」 선배의 호통과 갑자기 걸려오는 기자들의 전화문의에 혼비백산이 되었다. 다른 이는 이인호말고는 주동자가 또 누구냐고 추궁을 당했다. 유물보호를 내세워 철거를 지연시키다가 다음 정부가 들어서면 철거계획 자체를 무산시키려는 음모에 앞잡이가 되려느냐,정부가 철거시기를 완전히 발표하기도전에 왜 야단들이냐,청문회를 안열고 왜 서명부터 하느냐는 것 등이 서명움직임을 저지하려는 측의 이상한 논리였다. 마치 사활의 문제를 눈앞에 두고 투쟁하는듯한 이상한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문민시대로 접어든 신한국의 대학교수 사회에 어떻게 이런 이상기류가 스며들 수 있는가가 이제 내게는 유물보전보다 더 핵심적인 관심사가 되지 않을 수 없다. 박물관과 신문사 몇곳에 문의한 결과 얻어낸 정보는 박물관 철거논의는 밖으로 공개되기전에 빨리 헐어버리라는 압력전화부터 걸려오는 식으로 전개되었고,지금은 박물관 관계전문가들이 마음대로 입을 못여는 분위기라는 것이었다. 때마침 한국의 외규장각 도서반환 문제를 놓고 프랑스 국립도서관 사서 한사람의 사표가 프랑스를 위해 거대한 이권을 따내는데 성공한 대통령을 곤경에 몰아넣을 지경으로 사회 전체가 들끓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는 우리는 유물의 보전보다는 역사의 흔적을 지우는 일에 그처럼 열을 올리며 자유로운 토론 자체를 봉쇄하려는 우리 사회 일부의 분위기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다.
민주주의의 골간은 자유로운 의사개진과 충분한 토론을 통한 의견수렴이다. 고의적 허위 또는 확인되지 않은 낭설의 유포로 남을 해치는 경우가 아니라면 어떤 기이한 의견도 자유롭게 표출될 수 있어야 하며,그것을 막으려하는 것은 폭력이다. 구 총독부건물의 철거를 지지하는 쪽도 반대하는 쪽도 상대방이 경청할만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 더구나 즉각 철거를 주장하는 입장과 유물보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입장은 상치되기 보다 상호보완적인 면을 더 강하게 지니고 있으며 두가지가 다같이 중요함이 인정된다면 무리를 해서라도 빠른 시일내에 새 박물관을 지을 기금을 마련하는 방향으로 거족적인 해결책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어느 누구에게도 건물의 무조건 파괴가 목표일 수는 없다.
김영삼대통령은 소신에 따라 박진감있게 이를 추진하는 것으로 많은 국민의 갈채를 받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소신과 박진감은 국민의 폭넓은 지지에 근거를 둔 것이지 독단의 결과일 수가 없다. 혹시 소신과 독단을 혼동하는 과잉충성자들이 말보다 마차를 앞세우고 대통령의 귀를 가로막음으로써 또다른 형태의 총독부가 세워지는 길로 우리를 끌고 가지는 않을지 국민이 정신을 바로 차려야 하겠다.<서울대 교수·서양사>서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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