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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충돌/박찬식(화요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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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충돌/박찬식(화요칼럼)

입력
1993.08.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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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창단 1백50주년 기념 유럽순회 연주를 성공적으로 끝내면서 화려한 명성을 회복한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쿠르트 마주어는 89년 동독 민주화운동의 영웅이기도 하다. 당시 세계 최고의 교향악단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지휘를 맡고 있던 그는 에리히 호네커의 공산 독재정권에 항거하는 반체제 지식인그룹 「노이에스 포룸」(신광장)을 이끌면서 시위를 주도해 나갔다. 베를린 장벽 붕괴와 동독 공산정권의 몰락에는 라이프치히 시민의 이 민주화운동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파리와 함께 유럽의 한 문화 중심지인 라이프치히는 시민의 자부심이 높다. 개신교와 가톨릭이 결별하는 계기가 된 루터와 로마교회간의 대 신학논쟁이 이곳에서 벌어졌고,동서독으로 갈라진 후 칼 마르크스대학으로 이름을 바꾼 라이프치히대학은 법학과 철학부문에서 세계 제일의 권위를 인정받아왔다. 수학자 라이프니츠 문학평론가 고트셰트 대문호 괴테 철학자 피히테 작곡가 바그너 멘델스존이 모두 이곳 출신이다. 이런 지적 전통을 가진 라이프치히 시민에게는 냉전체제의 종말을 예고하는 대변혁기에 독일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야 한다는 자임의식이 있었다.

시민의 갈망을 한 곳에 모아 동독 민주혁명에 성공한 마주어는 새 동독정부의 대통령직을 권유받았으나 이를 물리침으로써 독일 통일을 앞당기는데 기여하기도 했다. 다음해인 90년 뉴욕 필의 제의를 받아들여 조국을 떠났는데,그때 한 기자회견에서 그는 『만일 일본 악단을 가지고 브루크너를 연주한다면 많은 변화와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미국 악단은 그 뿌리에 유럽에 있으니 큰 어려움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과 유럽문명의 동질성을 설명한 셈이다.

취재단 상호교환 협약에 따라 한국일보팀의 중국 취재여행을 안내한 인민일보 사람들은 호남성의 농민생활을 특히 보여주고 싶어했다. 도시민과의 소득격차가 커지면서 이농이 늘어나는 농촌현실을 중국이 어떻게 극복하고 있는지,그 대표적인 모습을 이곳에서 볼 수 있을 것이라는게 그들의 설명이었다. 중국의 농촌문제는 우리와 조금 다르다. 농민을 농촌에 남게 하는데 실패한다는 것은 12억의 인구를 먹일 식량을 자급할 수 없다는 얘기가 된다. 그것은 중국 공산정권의 파멸을 의미한다.

산동성과 사천성 다음으로 식량생산이 많은 호남성은 대륙 한가운데 있어서 주민의 성향이 보수적이며,농민의 결집력이 강해 함부로 다루기 어려운 곳으로 정평이 있다. 중국 공산혁명을 가능케 한 농민봉기의 진원지가 바로 이 곳이다. 모택동의 생가가 보존돼 있는 소산에서는 마침 그의 탄생 1백주년(12월26일) 행사준비가 부산한데,역앞에는 벌써 기념품 시장이 만들어졌다. 가게 주인은 모두 근처 농민이다. 작년에 이 곳을 방문한 사람이 1백8만명이었으니 올해는 줄잡아 1백50만명 이상은 되리라는 것이 안내인의 설명이다.

이곳에서는 또 모택동외에 유소기 팽덕회 하룡 나영환 율유 이부춘 호요방 등 현대 중국의 지도자가 다른 어느 지방보다 많이 배출된 것으로도 유명하다. 호남성은 이처럼 중국인의 고향과 같은 곳이어서 북경 당중앙의 배려가 각별하다.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호남성이 성공적인 농업지역으로서 든든한 뿌리의 역할을 해줄 것을 중국인은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 중국사람들이 요즘 한국을 말레이시아 태국 필리핀과 함께 네마리 호랑이로 분류해 부르고 있다. 한국과 함께 네마리 용으로 불리던 홍콩 대만 싱가포르는 장차 사회주의 시장경제가 성공해서 한마리의 큰 용으로 부상할 중국과 대중화경제권을 형성할 작은 용들로 남아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버드대 정치학 교수 새뮤얼 헌팅턴은 최근 미국의 국제문제 전문잡지 포린 어페어즈에 발표한 논문 「문명의 충돌(The Clash of Civilizations)」에서 냉전후의 세계는 미국을 포함한 서구문명과 비서구문명이 대립하는 새로운 긴장구도가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데올로기에 의해 연결돼 있던 동맹관계가 해체된후 그 안에 갇혀있던 소수민족들이 종교적 문화적 독자성을 주장하게 됐고,그것은 필연적으로 이문명간의 변경지역에서 유혈충돌을 유발하고 있다. 걸프전과 유고슬라비아 분쟁,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분쟁은 모두 서구문명과 이슬람문명의 대립관계로부터 발생했다.

서구문명이 추구하는 자유 평등 박애 인권 민주주의 개인주의 같은 현대 세속적 국민국가들의 양보할 수 없는 가치들이 회교문명이나 서구문명과 대등한 세력으로 곧 등장할 대중화경제권의 유교문명에서도 똑같은 가치일 수는 없다. 미국과 중국의 인권논쟁이 그 한 좋은 예다.

백인의 서구문명권과 한인의 중국문명권으로부터 배제된 한국인의 정체는 무엇인가. 우리와 비슷한 말로 말하는 사람들은 누구이며 우리의 의복,식생활,우리와 같은 느낌으로 웃고 울며 우리와 닮은 가락으로 노래하는 사람들은 어디 있는가. 새롭게 재편되는 세계를 우리와 손잡고 헤쳐나갈 이웃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된다.<편집국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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