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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야 솟아라」(김성우문화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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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야 솟아라」(김성우문화칼럼)

입력
1993.08.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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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이 간다. 8월은 광복의 달이요 태양의 달이다. 해마다 광복의 달이 와도 그날의 감격을 두고두고 되새길 시편이 우리에게 흔치않다. 태양의 달이 되어도 그 광명의 환희를 노래하는 우리의 「오솔레미오」가 안들린다. 그러나 우리는 잊고 있었다. 박두진시인의 시 「해」가 있다.<해야 솟아라. 해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은 솟아라…>

광복직후 쓰여진 이 시는 시인의 처녀시집 「해」의 표제시로 그후 학교 교과서에 실려 널리 알려진 명편이다. 8·15의 기쁨이 해라는 구체적 사물을 통해 상징화된 작품으로 풀이된다. 장중한 선율속에 희열과 희망이 넘쳐 흐른다.

이 시를 두고 시인 자신은 이렇게 쓰고 있다.

『언젠가는 한번 꼭 주제화하리라는 야심을 견지해왔던 해였던 것이 마침 8·15해방의 세기적 분출구를 만난 민족과 인류,현재와 영원을 일관할 수 있는 이상을 형상화하고자 했다』

그렇다면 시인에게는 그 이전부터 품고 있었던 해가 있었다는 말이다. 시인에게 물으면 그 해는 아무데나의 해가 아니라 고향이 있다고 한다. 박두진 시인과 동행하여 그 고향을 찾아간다.

경기도 안성군. 안성읍을 빠져나와 장호원으로 가는 국도를 약2㎞ 달리면 오른편 바로 길가에 자그만 마을이 나타난다. 보개면 동신리 평촌부락이다. 큰길쪽으로 국민학교가 있고 그 뒤편으로 농가들이 옹기종기하다. 40여 가구가 모여 산다.

마을에서 보면 사위가 온통 광활한 평야다. 멀찍이 높낮은 산들의 연맥이 강강수월래하듯 들판을 빙 둘러쌌다. 평촌부락은 그 원심에 고도처럼 외떨어져 있다. 논들은 벼가 자라 한창 싱싱하게 푸르다.

박두진시인은 안성읍에서 태어났지만 자신이 말하는 「가장 고향다운 고향」은 이 마을이다. 그는 여덟살때부터 열여덟살때 까지의 가장 다감했던 소년시절을 이 촌락에서 보냈다. 그때는 이 동네를 「고장치기」라 불렀다. 20여가구의 주민들은 일제의 착취에 수탈당하는 영세 소작농들이었다. 고장치기를 둘러싼 수백만평의 논벌은 안성의 곡창으로 「사갑들」이라 했다. 아직도 그 이름이 남아있다. 박두진소년은 이 들판을 가로질러 읍내의 학교까지 걸어서 다녔다.

박두진소년이 살던 집은 동네의 남쪽 가장자리에 지금도 있다. 집앞에 서니 동쪽으로 넓은 벌 넘어 멀리 차령산맥의 연봉이 한눈에 들어온다. 산맥너머가 충청북도 땅이다. 높은 봉우리중 가장 가까운 것이 청룡산. 이 한폭의 시야가 한 소년을 뒷날 시인으로 키운 액자다.

박두진시인은 말한다.

『나는 언제나 마당가에 나와 서서 아득하게만 보이는 차령산맥을 바라 보았다.

지금도 고향하면 가장먼저 내 가슴에 이마에 살과 넋에 와닿는 것은 이 고장치기를 구심점으로한 대자연의 위용과 그 전개다. 이 형상이야말로 나의 시적 영감과 시적 생명력의 원천이라 할 수 있다』

그가 해를 만난 것은 바로 이 고향의 자연속에서다. 아침마다 산맥너머 진천땅쪽애서 불덩어리같은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산맥동쪽 한 능선에서 구약성서의 새신랑 얼굴같은 해가 얼굴을 내밀었고 이럴 때마다 나는 더 말할 수 없는 가슴의 벅참을 느끼며 이 햇덩어리의 열기와 그 위용을 혼자 서서 바라보았다. 그 햇덩어리는 나에게 있어서 언제나 하나의 기적이며 황홀이며 힘이며 불멸의 그 뜨거움이었다』

해방을 맞았을 때 박두진시인은 안양에 살고 있었지만 그 감격과 환희가 바로 이 고장치기의 「맑디 맑게 이글거리던 완벽한 태양」을 눈앞에 떠오르게 했다고 한다.

그래서 시 「해」를 썼다. 「해」는 이렇게 시인이 상상력의 출발점인 고향에서 어릴떼 체험한 원초적 직관의 산물이다.

박두진시인의 옛집에는 40여년째 이 집을 지켜온다는 농군이 살고 있었다. 좀 변형이 되었다고는 하나 농가 모습 그대로의 고가다. 주인은 옛 집주인인 시인의 이름을 듣고 아는체를 한다. 시인으로서는 오랜만의 귀향이다. 그가 소년시절 일출을 바라보고 섰던 집앞의 좁은 마당에는 빨갛게 고추가 널리고 황소가 한마리 엎드렸다. 이웃에 사는 8순이 넘은 할머니가 「뒤진」(두진을 어릴때 이렇게 불렀다)을 알아보고 반갑게 손을 잡는다. 박두진시인이 이 마을을 떠난 것이 꼭 60년전이다. 할머니는 그대 갓 시집은 수줍은 새댁이었다.

고장치기의 사갑들에는 날마다 새로운 해가 뜬다. 해는 어디서나 뜨는 것이지만,그리고 누구나 무심코 보는 것이지만,한 소년이 이 곳에서 유심히 바라보던 해는 여느해야 다르다. 우리 모두에게 영원히 지지 않는 해가 되었다. 그 소년이 대시인으로 자라 올해 만 77세. 이 희수를 기념하여,누구나 애송하는 명시에 대한 경의로,소년이 온 얼굴에 환한 햇살을 받고 섰던 자리에 해맞이의 표석이라도 세우자. 여기 서면 언제나 또 누구에게나 「이글이글 앳된 얼굴 고운 해」가 솟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가장 빛나는 광복의 기념비가 될 것이다.<본사 상임고문·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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