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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적 공권력」의 퇴장(장명수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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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적 공권력」의 퇴장(장명수칼럼)

입력
1993.08.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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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야운동가 김근태씨를 고문한 혐의로 재판을 받아온 전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소속 경관 4명이 마침내 법정구속됐다. 경정·경감·경위로 일했던 김수현(57) 김영두(54) 백남은(58) 최상남(45)피고인은 91년 1월 1심에서 징역 2년∼5년을 선고받은후 도주의 우려가 없다는 이유로 구속되지 않았으나,23일 서울고법은 징역 1년6월∼3년으로 형량을 낮추면서도 그들을 즉각 구속하여 고문자들을 단호하게 응징했다.7년11개월전의 고문사건으로 수사관들이 구속되는 모습은 「야만적인 공권력의 시대」가 막을 내렸음을 확인하게 한다. 당시 민청련 의장이었던 김근태씨는 민추위를 배후조종한 혐의로 치안본부 남영동 분실에 끌려가 23일간 10여차례의 물고문·전기고문을 당했고,풀려나자마자 고문자들과 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싸움은 「달걀로 바위치기」였다. 검찰과 법원은 고문당한 국민의 호소를 외면했다. 그들은 오히려 고문자들을 보호했다

85년 10월 김근태씨는 발뒤꿈치 등에 남아있는 고문흔적 증거보존을 서울지법에 신청했으나 기각당했다. 86년 1월 그는 고문한 경관들을 고발했고,서울지검은 그 사건을 1년이나 끌다가 무혐의로 종결했다. 89년 2월 그는 서울고법에 재신청을 냈고,6공이 출범한 이후인 88년 12월 재정신청이 받아들여져 비로소 재판이 시작됐다.

길고 긴 싸움이었다. 정권의 파수꾼으로 전락하여 국민을 고문하는 공권력을 결코 용서하지 않았던 한 운동가의 집념이 이 사건을 오늘까지 끌고왔다. 이미 세상을 떠난 조영래·황인철변호사 등이 그와 함께 싸운 굳센 동지들이었다.

마침내 고문경관들이 구속된 23일,김근태씨는 『이번 판결을 계기로 국민을 고문하는 야만적인 공권력이 우리 사회에서 영원히 사라지기를 빈다』고 말했다. 고문도구 등 직접적인 물증 없어 피해자의 진술만으로 법원이 유죄판결을 내릴 수 있을 만큼 그는 8년전의 고문과정을 생생하게 증언했으나 『고문경관들 역시 시대의 희생양』이라고 말하고,고문을 지시한 상부에 대한 진상규명을 촉구했다.

부천경찰서 성고문사건,박종철군 「시국사건」과 함께 5공의 대표적인 인권유린 사건이었던 김근태 고문사건은 이제 고문경관들의 구속으로 국민의 악몽을 어느 정도 달랠 수 있게 됐다. 고문자들이 거리를 활보하는 세상,경찰의 「고문기술자」가 도망을 친후 5년이 가깝도록 잡히지 않는 세상에서 국민들은 폭력적인 공권력에 대한 공포로부터 해방될 수 없었다. 일본 경찰의 혹독한 고문을 기억하고 있는 국민들은 다시 내 나라 공권력의 야만성에 벌벌 떨어야 했다.

김근태씨의 말대로 고문경관들은 「어둡던 시대의 희생양」이다. 그들은 어리석은 하수인이었다. 그러나 이제 고문자들이 몰락하는 사필귀정의 역사를 확인한 사람들은 그 누구도 어리석은 하수인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고문자들의 법정 구속을 보며 우리가 새기는 교훈이다.<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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