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오래된 것은 문화다. 녹슨 철물이나 이끼낀 돌이나 그것이 자연상태 그대로가 아니고 인공이 가해진 것이면 문화가 된다. 문화는 당대의 자로만 재어지는 것이 아니다. 긴 역사의 단위가 문화의 눈금이다. 문화는 역사의 시비를 초월한다. 역사의 때가 묻으면 시역의 칼도 매국의 문서도 문화재다. 역사의 영욕을 도색하는 것이 문화다.이런 순수한 문화적 관점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구 조선총독부 건물의 철거는 결국 대통령의 결단으로 결판이 났다. 오랜 망설임이었다. 국민여론도 이제 이의를 제기하는 목소리는 거의 안들린다. 그렇다면 헐기로 하자. 헐되 새 국립중앙박물관은 어디다 세울 것인가. 문화체육부에서는 용산의 가족공원으로 정했다고 발표했다. 꼭 그 자리야 옳겠는가.
세계사를 보면 절대왕정을 무너뜨린 시민혁명도 왕궁을 부수지는 않았다. 그 왕궁들이 남아 세계적인 박물관이 된 경우가 많다.
우선 파리의 루브르박물관. 역대 프랑스의 국왕의 거성이던 루브르궁은 대혁명후인 1793년 국민의회의 결의에 따라 왕실의 수장 미술품을 전시하면서 공화국 박물관으로 일반공개되었다. 그후론 나폴레옹의 전리품,여러 발굴물,구입품 등이 보태져 오늘에 이른다.
러시아의 페테르부르크(레닌그라드)에 있는 유명한 에르미타즈미술관도 건물이 제정시대의 동궁이다. 궁내 일부에 이미 제실미술관이 개설되었던 것을 1917년의 혁명후 국유화하여 왕궁 전체를 전시실로 만들고 소장품도 정비했다.
루브르나 에르미타즈가 호화로운 단일건물이라면 중국 북경의 자금성은 여러 건물의 동양식 궁성이다. 이 안에 고궁박물관이 있다. 명 청의 황궁이던 자금성은 황제의 거소이던 북반부의 내정 각 궁전에 1925년 민국정부가 궁중 소장품 일체를 진열하여 박물원으로 개원했다. 1949년 중공정부 수립이래 미술품 수만점이 추가되었다.
우리나라 조선왕조의 정궁은 경복궁이다. 이태조의 서울 정도와 함께 창건된 조선조 건국의 왕궁이자 임진왜란때 전소된후 고종때 중건한 조선조 마지막 왕궁이다. 일제가 침략과 함께 허물어버린 경복궁의 각 전각들이 91년부터 복원중에 있다. 97년까지는 완공될 예정이다.
앞을 가로막는 구 총독부 건물이 헐리고 경복궁의 모습이 되살아나면 이 고궁을 그냥 고궁으로만 두고 볼 것인가. 전각마다 실내는 텅비게 된다. 지금도 근정전안을 들여다보면 옥좌만 덩그럴뿐 휑하다. 비워둘 것이 아니다. 건물마다 안을 채우는 것이다. 박물관의 유물들을 거기에 진열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도 고궁인 경복궁 자체를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꾸미는 것이 어떻겠는가.
물론 경복궁의 건물만으로는 전시면적이 태부족이다. 앞으로 복원할 건물은 20동 가량이요,연면적은 1천5백평쯤 된다. 현재 중앙박물관의 전시면적은 3천평에 이른다. 기존 건물과 함께 복구될 건평을 다 전시장으로 쓴다 하더라도 모자란다. 게다가 새 박물관은 훨씬 넓혀야 한다는 의견들이 나와 있다.
이럴때 루브르박물관의 피라미드가 암시를 준다. 최근까지 루브르의 박물관 면적은 3만평방미터(약 9천평)이던 것이 몇해전 건물의 한쪽 날개를 쓰고 있던 재무성을 내보내면서 이 옛 궁전의 5만평방미터 전체가 전시실이 되었다. 대신 건물의 큰부분을 차지했던 사무실과 창고외에 연구소·휴게실·화랑 등 부대시설을 지하로 한데 모았다. 버스 등 자동차 6백대분의 대형 주차장도 여기에 들어선다. 이 지하면적만도 2만6천평방미터(약 7천8백평)다. 83년에 착공한 이 공사는 95년에야 끝난다. 루브르의 앞뜰에 세워진 대형 유리 피라미드는 이 지하 루브르의 입구다.
우리 경복궁인들 지하에 박물관이 못들어갈 것 없다. 부대시설만 말고 전시실까지 넣는다. 지상의 고궁건물에는 왕실관계 유물들만 내놓고 나머지는 모두 지하박물관에 진열해도 된다. 전시품 관리의 온도나 습도를 걱정하는 사람은 60년대에 이미 완성한 미국의 오클랜드박물관에 물어보는 것이 좋다. 정원 밑에 세워진 이 박물관은 부분적으로 지상에 나와있고 대부분이 지하 2층이다. 아니면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시에 자문해도 된다. 이 도시는 4층짜리 지하박물관을 설계중에 있다.
새 박물관의 자리를 찾아 그동안 수고로이 헤맸다. 깨닫고 보면 먼데 있지 않다. 제자리에 있다. 제자리의 땅밑에도 있다. 새 땅이 필요없고 지금의 박물관 소장품을 옮길 걱정을 훨씬 던다. 땅밑이라 해서 땅위보다 건축비가 더 들지도 않는다.
고궁은 그 자체가 귀한 유물이다. 박물관에 꼭 들어가야 할 문화재다. 고궁을 통해 들여놓을만한 박물관은 고궁밖에 없다. 경복궁 경내는 총면적이 13만평이다. 미관을 하나도 다치지 않고 그 넓은 궁원의 지상·지하가 우리 민족사의 박물관이라니. 크기로는 세계 최대의 박물관이 될 것이다. 민족정기뿐 아니라 민족의 기상이 가슴을 펼 것이다. 내년에 맞는 서울정도 6백주년의 모뉴먼트가 될 것이다.<본사 상임고문·논설위원>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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