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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전유죄 금융풍토/홍선근 경제부기자(기자의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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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전유죄 금융풍토/홍선근 경제부기자(기자의 눈)

입력
1993.08.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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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의 경제기틀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금융실명제가 전격 시행된 첫날의 모은행 서대문지점. 전산프로그램 준비 등으로 하오 2시에 문을 열어 미리 기다리던 고객들로 붐비는 가운데 백발이 성성한 노인 한분이 돈을 찾으려고 통장을 창구에 내밀었다.창구 여직원은 실명제 실시후 첫거래에서는 실명여부를 확인하도록 돼있으므로 노인에게 주민등록증을 제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마침 노인은 주민등록증을 갖고 있지 않았다. 노인은 『이 늙은이는 실명제가 뭔지도 모르지만 많은 액수가 아니니 내달라』고 요구했다. 여직원은 『그럴 수 없다』고 답변했고 몇마디가 더 오간후 노인이 결국 『내돈 내가 찾는데 왜 안주느냐』고 고함을 쳐 점포안이 시끌벌적했다. 노인은 끝내 돈을 찾지 못한채 분을 삭이며 은행문을 나섰다.

또 다른은행의 반포지점에서는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주부가 창구직원에게 사정을 했다. 자기 주민등록증을 갖고 남편명의의 통장에서 돈을 찾으러왔는데 남편의 주민등록증도 있어야만 인출이 가능하다고 해 『아이가 내일 여행을 가는데 필요한 여비니 사정을 감안해달라』는 거였다. 주부는 주민등록증의 호주란에 남편의 이름이 명기돼 있지 않느냐고 통사정이었으나 직원은 역시 요지부동일 뿐이었다.

이때 지점의 한 간부가 점포에 꽉 들어찬 사람들중에서 60대의 아주머니를 보더니 『댁으로 몇차례 전화를 드려도 안받으시더니 어디 계셨습니까』라며 반가운 표정으로 달려 나왔다. 그리고는 이내 창구 안쪽의 사무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창구에 대기중이던 한 고객은 『이 근처에 사시는 돈많은 분』이라고 말했다. 아마 가명계좌 등으로 거액의 돈을 맡겨놓고 있는 큰손인데 은행쪽에서 먼저 실명제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지를 고객관리 차원에서 자문하는 것이리라. 그렇지 않으면 큰 거래선을 다른 경쟁자에게 뺏길테니까.

실명확인이 중요하지만 기계적 적용은 곤란하다. 돈 10만∼20만원을 빼는걸 규제하려는게 실명제의 취지가 아니다. 아니 거꾸로 실명제를 통해 돈의 전모가 드러나야 하는 가명의 거액들은 금융기관에 의해 보호를 받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국민 대다수를 차지하는 「실명」의 작은 손엔 보다 유연한 자세를 갖는게 혼란을 줄이면서 실명제를 뿌리내리는데도 도움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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