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정요인 다섯분의 유해가 항아리에 담긴 한줌 재로 환국한 것이 지난 5일의 일이다. 그분들은 고국 땅에 편히 쉬시도록 묻는 날이 오늘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선열 5위 봉환 국민제전」이,상오 10시부터 국립묘지에서 열리는 뜻깊은 행사의 이름이다.겨우 다섯분의,그나마도 너무나 뒤늦은 봉환을 두고 정부가 다소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데는 까닭이 없지 않다. 대개는 짐작할만한 것이다.
『선열들께서 고국 땅에 돌아와 우리와 함께 계심으로써 우리 대한민국은 헌법에 명시한대로 상해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민주정부로서의 정통성을 더욱 공고히 밝히게 됐다』(황인성총리 「봉영사」)고 보기 때문이다. 유해가 환국하던 날 김영삼대통령도 영현봉안관으로 달려가 분향하면서 임정과 문민정부를 잇는 정통성에 대해 언급했다. 그는 또 『유해 봉환을 계기로 우리의 애국심이 뜨겁게 소생하기를』 기원했다.
정작 뜨거운 장면들이 지난 며칠 동작동 국립묘지에서 연출된 것은 그러나 김 대통령 자신도 예상했던 일은 아닐 것이다. 누가 불러서도 아니고 누가 시켜서는 더욱 아닌 시민들이 낯설고 빛바랜 영정앞에 꾸역꾸역 줄을 섰다. 이 모습을 설명할 수 있는 적절한 말을 찾기는 쉽지 않다. 대전엑스포 같은 희대의 볼거리도 아니고 인간띠 잇기대회 같은 통일의 열정도 아니다. 말없이,그러나 눈빛으로 말하는 시민들이 떼지어 8월의 동작동 언덕에 몰려들었다. 할아버지세대 아버지세대가 손자세대 아들세대와 함께 섞였음은 그 자체가 아름다운 풍경이다. 희망이고 감동이다. 어려운 말로 뜻을 설명하려는 것은 정치인의 몫일 뿐이다.
70년도 더 지난 옛날 중국 대륙에서 숨져간 「임정 할아버지들」의 항아리에 담긴 유해가 오늘을 사는 시민들의 마음을 잡아당긴 까닭은 무엇일까. 정치구호가 되어버린 법통이나 정통성 말고도,싸구려가 다된 애국심 말고도,이 「과거사」와 현재를 잇는 무엇인가를 설명할 수 있는 말은 없을 것인가.
1945년 늦가을,김구주석을 비롯한 상해 임시정부는 「개인자격」으로 광복된 조국땅을 밟는다. 그때 연희전문의 노천극장에서는 전체 교수 학생이 모인 가운데 위당 정인보선생의 기념강연이 있었고,그 강연에서 위당은 상해 임시정부를 「지하를 천리나 잠류한 끝에 다시 솟아흐르는 황하」에 비유했다고 한다. 이 장면을 전한 서여 민영규선생에 의하면 이 비유는 옛 한때 장건이 서역에 갔다가 견문한 보고기록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장건은 카라코람 만년빙설이 녹아내린 대하가 북쪽으로 천리를 흘러 타클라마칸 사막 한가운데서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후 지하로 천리를 잠류,신강성 청해에서 비로소 위로 솟아 그로부터 황하를 이룬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위당의 이 비유를 다시 풀어서 설명하면 『경술년에 나라가 망한 것은 참으로 민족의 정기가 망한 것이 아니고 황하가 그러하듯이 잠시 지하로 모습을 감췄을뿐인 것이다. 지금 돌아온 상해 임시정부가 바로 지하로 잠류했다 솟아난 민족정기의 산 증거이다』가 된다.
이 이야기를 서여는 얼마전 「위당 탄생 백주년 기념강연」에서 했다. 우리에게 임정이 소중하고 「임정 할아버지들」의 뒤늦은 환국이 감격스러운 까닭은 민족정기가 죽지않고 살았음을 확인하기 때문인 것이다. 바로 그 민족정기를 지난 며칠동안 동작동에 몰려와 줄섰던 무명의 시민들이 뜨겁게 보여 주었다. 그들을 불러낸 힘은 민족의 얼일뿐 아니라 어떤 수사도 아닐 것이다.
김영삼 정부의 개혁이 두려워할 세력이 있다면 어떤 수구세력이나 기득층이 아니라,동작동 국립묘지를 자발적으로 찾아오는 이들 무형의 민족 얼이어야 한다. 이들 민족 얼이 지켜보는 역사여야 한다. 다만 짧은시간의 이해득실이나 눈앞의 하찮은 저항때문에 도도한 역사의 대하에 눈감아서는 개혁은 실패의 길로 들어서고 말 것이다.
역사는 민족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비춰주는 거울이다. 이 세상에는 더러 감추고 살아갈 수 있는 어수룩한 구석이 없지 않지만 역사의 거울앞에서는 완전범죄가 없다. 과거사를 바로 알고 그 과거사의 찌꺼기를 바로 청산하지 않는 민족에게 제대로 생긴 민족 얼이 있을 수 없다. 광복이후 반세기 가까운 오늘에 이르도록 우리의 현대사가 형편없이 왜곡되었던 것은 우리가 민족의 정기를 되살리는데 소홀했기 때문이다.
동작동에 찾아온 이름없는 시민들의 행렬이 그것을 거듭 일깨우고 있다. 과거의 잘못된 역사는 다소 부담이 되더라도 지금 바로 잡아야 한다. 과거에 매달리자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바로 잡는데 매달려야 한다는 뜻이다. 민족정기를 살려내자는 것이다.<본사 주필>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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