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된후 지도자들중에서 가장 먼저 별세한 분은 동오 안태국선생이었다.동오는 한번도 큰자리를 맡지 않았지만 독립운동사상 참으로 큰인물이었다. 일제의 강압으로 나라가 기울자 신민회의 핵심인물로 서도총감으로,또 태극서관을 맡아 경영했고 일제가 조작한 사내 총독암살사건에 연루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고 7년형을 언도받았으나 그는 조금도 굴하지 않고 분연히 맞섰다. 그의 장처는 후배인 도산 안창호를 지도자로 밀고 자신은 뒷전에서 묵묵히 궂은 일을 도맡은 것. 때문에 그에 죽음에 도산은 『대한사람중이 제1의 애국자』라고 가장 슬퍼했고 이동휘 국무총리는 장례식에서 『형님! 우리들이 무슨말씀을 드려야 합니까』라며 방성통곡하여 식장을 울음바다로 만들었다.
언론인이자 역사학자이며 교육자인 백암 박은식선생은 국운이 기울때부터 줄기찬 문필활동으로 국민을 깨우쳐 구국운동을 편 국사였다. 그는 국내에서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의 주필,서북학회 회장,오성학교와 협성학교의 교장을 지냈고 망명후 어려운 상황속에서도 우리나라의 역사를 쓰는 일을 계속했다. 백암이 피눈물로 쓴 「한국통사」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불후의 명저로 꼽힌다. 25년 3월 임시정부 의정원이 이승만대통령을 탄핵,파면한후 후임으로 추대하는 것을 백암은 한때 완강히 고사하다가 결국 수락했으나 가난과 병고로 67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임정 초기시절 아들(박시창)의 친구로 함께 선생을 모셨던 언론인 나절로(우승규)는 『선생은 극빈속에서도 배갈 한병에 센차이(소금에 절인 배추)와 땅콩을 안주삼아 의연하게 역사책을 쓰셨다』고 전했다.
신규식선생은 26세때 나라가 일제에 의해 강탈당하게 되자 비분강개하여 음독자살을 기도했다가 시신경을 크게 다쳐 사팔눈이 되었고 이에 스스로 예관이란 아호를 짓고 중국 망명길에 올랐다.
예관은 원래 무관출신이었으나 망명후에는 손문 등 중국지도자들과의 교의를 토대로 나중 임정을 세울때 뒷바라지역과 함께 광동의 호법정부로부터 임정의 승인을 받아내는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다.
임정의 법무총장과 국무총리를 지낸 예관은 역저 「한국혼」에서 투철한 애국정신을 강조,『망국의 병은 선조의 교화와 종법을 잊는 것,선조의 공열과 이기를 잊는 것,국사를 잊는 것,국치를 잊는 것으로서 망국병을 고치려면 이상의 4가지를 잊지 말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생전에 임정요인들에게 3천만 동포를 위해 진력해달라고 누누이 당부했던 예관은 「정부!」 「정부!」라고 외치며 눈을 감았다.
어렸을 때부터 항우와 같은 대장이 될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던 계원 노백린장군은 타고난 무골이었다. 일본 육사를 나온뒤 구한말 무관학교 교관에 이어 노·일 전쟁 때는 관전사가 되어 군사경험을 넓혔고 이어 무관학교 교장 연성학교 교장 헌병대장을 지내는 동안 국운이 흔들리자 친일 대신들을 간신·역적이라고 공격이라는 한편 통음으로 울분을 삭였다.
군대해산뒤 낙향했던 계원은 14년 미 캘리포니아로 건너가 항일전에 대비,비행학교 설립에 힘을 쏟다가 3·1운동이 일어나자 상해로 합류한다. 5년간의 군무총장에 이어 국무총리를 지낸뒤 51세로 눈을 감았다. 지난날 우람했던 체구는 말년 영양실조와 병고로 말이 아니게 변했다. 매일 한밤중이면 일어나 고국쪽을 향해 『왜놈들을 치러가자』며 고함을 질러 동숙했던 노투사들을 울렸다.
이역에서 한을 품고 숨졌던 임정 요인 다섯분의 유해가 환국했다. 「한국의 민족혼」 「한국의 정신」이 돌아온 것이다.
부귀 권력 평안 명리를 모두 버리고 가족들마저 희생시킨채 오직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에 애국정성을 다하다 가난과 기아와 신고속에 눈을 감았던 선열들을 우리는 어떤 몸가짐으로 맞아야 할 것인가.
조국광복의 기쁨도 잠깐,국토가 분단되고 그나마 세워진 반조각나라는 친일파들을 단죄·정리하기는 커녕 계속 득세하여 국민위에 군림케하고 또 3·1정신에 의한 자유민주의 공화국이 군사쿠데타와 정변으로 이 나라 민주발전,국운을 후퇴시킨 일들을 무엇이라고 사죄를 올릴 것인가.
이제 문민시대를 맞아 헌법 전문대로 임정의 법통한국의 정신을 재확인하면서 모든 정치인과 각계의 지도층들은 깊이 반성해야 할 것이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