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가 없어지면 어떻게 될까. 정전이라도 된듯이 온세상이 캄캄해질까.정말 정전이 되었다고 치자. 밤이라면 촛불이 어둑해 답답할 것이고 냉방기가 가동되지 않아 더위가 짜증날 것이고 일반가정에서는 냉장고가 서버리는 것이 걱정일 것이고 세탁기가 안돌아 불편할 것이다. 이때 TV를 못보는 것이 더 억울하다는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인가. 적어도 더 많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TV는 냉장고나 세탁기보다 생활에 유용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TV가 없으면 인생이 무의미한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TV에 대한 과신은 이런 착각에서 시작된다.
방송시청자의 권익옹호를 위해 앞정서온 서울YMCA 시청자시민운동본부가 7월7일을 「TV 없는 날」로 정하고 이날 하루 TV를 끄자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것은 이채롭다. 시민운동본부는 『방송사들이 프로그램의 질적 향상을 꾀하겠다던 국민과의 약속을 저버리고 프로그램의 획일화와 저급한 오락화로 국민 모두를 저능아로 받들고 있다』고 개탄한다. 구체적으로는 금년 봄철에 개편된 각 TV의 프로그램을 모니터하여 그 결과를 발표하면서 황금시간대에 저질의 쇼·코미디·드라마가 몰려있고 교양물을 확대한다더니 오락물과의 구분을 자의적으로 하여 %(퍼센트)만 눈가림한채 실제로는 오락물이 판치고 청소년 대상 프로그램도 흥미위주라는 것 등을 지적했다. 이렇게 민간 상업방송뿐 아니라 공영방송조차 제 역할을 버린채 소란하고 경박한 화면으로 오히려 시청률 경쟁을 주도하고 있으니 하루만이라도 시청자 모두가 TV를 끔으로써 이 「시청률」에 휩쓸리지 말고 방송사를 각성시켜 시청자운동의 계기를 마련하자는 것이다.
우리나라 TV의 심각성이 제기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SBS가 개국되면서 더욱 우려했던 저질화의 경쟁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이럴때 시청자 시민운동본부의 제안은 공감이 간다.
그래,TV를 하루 꺼보자. TV앞을 떠나면 공해에 시달리듯 침침했던 눈이 푸른 하늘 바라보듯 시원해질 것이다. 그동안 우리의 눈은 너무나 안식하지 못했다. 눈의 방학이다. 또 종일 소음에 시달렸던 귀의 잉잉거리는 이명도 가실 것이다. 오랜만에 찾은 집안의 정적. 그러고보면 지금까지 환기안된 실내처럼 변조없는 훤소속에 갇혀있었다. 이 시청각의 해방은 정좌하듯 자신으로 돌아오게한다. 실로 오랫동안 모두들 자신을 TV에 내맡긴채 잃어버려왔다. 자신의 구출이요 회생이다. TV는 백일몽 제조기라고들 한다. 백일몽같은 환상을 키워놓는다. 이 환상으로부터의 탈출은 제정신을 치리는 것이다. 제정신을 차리고 보면 자기가 얼마나 TV를 닮아있는가를 깨달을 것이다. TV세트처럼 다른 사람과 균질화되고 TV 화면모양 사고방식이 심도없이 평면화된채 그 저질의 프로그램만큼 자기도 저질화해 버린 줄을 알 것이다. 지각이 마비되어 있는데도 놀랄 것이다. 어느새 유아기로 퇴행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도 될 것이다.
TV는 현대인에게 자연보다 더 큰 환경이다. 자연보다 더 가까이,더 오래 곁에 있다. 그런데 오염된 대기라고 숨쉬지 않을 수 없고 오염된 식수라고 마시지 않을 수 없지만 오염된 TV는 보지 않아도 된다.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환경이다. TV를 종일 꺼보면 산은 움직일 수 없어도 TV는 버릴수도 있는 자신의 힘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TV는 심심해서 본다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TV가 없고 보면 지금껏 TV에 빼앗긴 시간이 분할 것이다. TV는 시간의 도적이다. 오랜만에 도로 찾은 자신의 시간이 소중해진다. 심심할 겨를이 있을 뿐이다. 갑자기 할일이 많아진다. 생각해보면 유독성 TV앞에 너무 오래도록 노닥거리고 있었다. TV를 끄고 무슨 일부터 할까. 그 시간에 책이라도 읽자.
우리나라에서 독서인구를 감퇴시키는 큰 요인의 하나가 TV다. 시간탓만이 아니다. TV 오락프로의 장기적인 시청은 주의력의 지속시간을 짧게하고 그래서 독서에 대한 집중력을 저하시킨다는 연구결과가 나와있다. 특히 어린이들에게 영향이 크다. 독서시간의 탈환과 독서능력의 복원이 급하다. 「TV 없는 날」 하루 전국에서 책읽는 소리가 낭랑할때 1년내내 TV를 켜지 않아도 무료하지 않을 줄을 알게된다.
TV를 하루라도 안보면 연속극의 줄거리가 궁금하여 안달이 날 것인가. 그 정도의 재미나는 이야기는 책속에 수두룩이 있다. 「TV없는 날」이 그것을 확인할 좋은 기회다. 책은 TV와는 달리 꼭 그 시간에 켜지 않아도 되고 오히려 채널이나 프로그램이 무한하다.
진정 마음 먹고만 끈다면 「TV 없는 날」 하루만으로도 TV가 반드시 일용의 필수품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지금같은 TV는 없어도 전혀 불편하지 않을때 비로소 TV는 TV를 끄고 돌아앉은 시청자처럼 제정신을 차릴 것이고 그래서 그 프로그램은 책만큼이나 유익해질 것이고 그때 정말 TV가 없으면 불편해질 것이다.<본사 상임고문·논설위원>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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