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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로서의 6·25치욕(사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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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로서의 6·25치욕(사설)

입력
1993.06.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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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를 체험으로 기억하는 세대가 있는가 하면,「역사」로 인식하는 세대도 있다. 그것을 체험으로 기억하는 세대도 그것이 얼마나 비극적인 전쟁이었던가를 파악하는 정도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 밖에 없다. 더구나 체계적으로 종합·정리한 「역사」를 갖지 못한 상황에서는 아직도 제대로 인식이 안돼있는 상태라고 할 수 밖에 없다.세계의 전쟁사가들은 6·25가 2차 대전후 최대의 전쟁이었다는 점에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권위있는 공식통계는 아직 없지만,이 동족상잔으로 죽은 한국인만 남북 합쳐 크게는 4백만에서 적게는 3백만으로 꼽히고 있다. 중공군은 약 1백만,유엔군은 5∼6만명이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엄청난 비극이 이 땅에서 동족끼리 총부리를 겨눈 결과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그로부터 43년동안 매일처럼 되씹으며 살아왔다.

6·25는 특히 87년이후 젊은세대에 의해 민감한 정치적 관심의 초점으로 등장했다. 한때 일부 학생들 사이에서는 「북침설」이 「진보적」이라는 딱지와 동일시된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이 치욕적이고 비극적인 동족상잔의 책임을 「북침설」로 모면해보려면 북측의 잠꼬대는 지난날의 후견자요 동행국이었던 소련의 붕괴로 설 땅을 잃었다. 88년 서울올림픽이후 서울에 온 많은 북한출신 망명자들에 의해 김일성의 남침을 구체적으로 밝히는 증언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러시아정부는 옐친 대통령의 군사보좌관인 볼코노프 대장이 수집한 6·25 관련자료들을 우리측에 넘겨주기로 하고,그 목록을 한승주 외무장관에게 전했다. 그 내용은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남침 승낙을 요청한데서부터,스탈린이 「제62특별항공군단」을 조직해서 김일성 구원에 개입한 일,그리고 휴전협상에 응하기까지의 과정을 밝힐 것으로 기대된다.

소위 「북침설」의 잠꼬대가 설 땅을 잃은 이제 대화와 통일이라는 명분밑에 「냉전적 시각」을 벌려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물론 통일은 우리의 민족적 과제요,대화는 「평화」를 지향하는 한 당연한 과정이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전제로 한다. 북의 김일성 숭배체제와 권력의 부자세습,그리고 변함없는 병영체제와 핵의혹은 북이 여전히 「전쟁이 기생」하는 체제임을 보여주고 있다.

동족상잔의 치욕과 비극이 터진 그날을 우리는 오늘 마흔세번째 맞는다. 냉전이 끝난 지금도 남북은 여전히 6·25의 기억속에 맞서 있다.

우리도 이 세계 마지막 냉전구조를 허물어야 할 일이 급하다. 우리는 북측이 전쟁 기생체제를 포기함으로써 이 땅에 안정된 평화와 대화가 구조화하기를 기대하고 싶다. 세계적인 전환점에서 맞는 6·25에 강조해두고 싶은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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