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모금운동… 95년께 완공계획/88년 1단계 준공후 폐허로 방치평화의 댐은 5공 말기에 북한의 금강산댐 건설에 따른 수공위협에 대응한다는 정부 안보논리의 지배를 받아 객관적이고 설득력있는 검증절차를 거치지 않은채 추진된 해프닝의 산물이다.
지난 86년 10월23일 내외통신이 북한 평양방송을 인용,「북한이 금강산발전소 건설공사를 착공했다」고 보도한 것이 평화의 댐 건설의 시발점이었다.
정부는 북한 최고인민회의가 수풍댐보다도 큰 금강산댐 건설계획을 결정했고 이 발전소건설을 위해 5만명의 군병력을 동원키로 결정했다는 등의 금강산발전소 관련 정보를 이례적으로 상세히 공개했다.
여기에 군사적 해석이 곁들여져 금강산댐 건설계획은 안보차원의 문제로 부상,온나라가 뒤숭숭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북한이 길이 1천1백m,높이 2백m,저수능력 2백억톤에 달하는 금강산댐을 지어 대남 수공용으로 악용할 경우 수소폭탄과 맞먹는 위력을 발휘해 서울을 비롯한 한강유역 전체가 순식간에 수몰된다는 점을 정부는 힘주어 강조했다. 이같은 안보논리는 대북 정보가 정부에 의해 철저히 장악되고 있던 당시 상황에서 여과없이 수용돼 국내 매스컴에 의해 대서특필됐고 국민 대부분도 이를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특히 이같은 정보는 미국이 제공한 것으로 알려져 신뢰성으로 포장돼 있기도 했다.
금강산댐 건설 규탄대회가 열리는 등 안보열기가 한창 고조될 때 정부는 86년 11월26일 국방 건설 문공 통일원 등 4부장관 합동으로 담화를 발표했다. 북한의 수공위협을 저지할 수 있는 대응댐을 건설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곧바로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평화의 댐 건설 추진위원회」가 발족돼 본격적인 댐건설계획이 착수됐다. 높이 1백90∼2백m,길이 1천1백m의 규모로 총 6천억원을 투입해 94∼95년께 완공키로 하는 계획이 잡혔다.
민간차원에서는 정수창 당시 대한상의 회장을 위원장으로 「평화의 댐 건설지원 범국민추진위원회」가 결성돼 건설자금 마련을 위한 범국민 모금운동이 전개됐다.
평화의 댐은 이듬해인 87년 2월28일 금강산댐과 4㎞ 정도 떨어진 강원 화천군 간동면 구만리에서 착공됐다. 수자원공사 발주로 지명 경쟁입찰방식에 의해 삼성종합건설 대림산업 쌍용건설 등 3개 건설업체 컨소시엄에 맡겨진 댐건설은 착공후 1년3개월만인 88년 5월27일 높이 80m,길이 4백10m 규모의 1단계 공사가 마무리돼 88올림픽을 앞두고 화려한 준공식을 가졌다.
이 1단계 공사에는 국민성금 6백39억원과 국방예산 9백56억원등 모두 1천5백95억원이 들어갔다. 정부는 1단계 공사를 마친후 수공위협을 예방하는데 일단 충분한 규모라며 북한측의 금강산댐 건설추이를 지켜보며 2단계 공사를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런뒤 60개월이 지났다. 평화의 댐은 6년째 아무런 쓸모없이 폐허로 방치되어 있다. 완공후 한때 안보관광지로 각광을 받기도 했지만 그것도 잠시,지금은 관광객의 발길도 거의 끊어졌다. 정부측에서는 이곳에 댐관리인을 한명도 배정하지 않고 있으며 댐인근 산속에는 공사 당시 동원됐던 녹슨 불도저 등 중장비 17대가 오갈데 없는 폐품으로 방치되어 있다. 또 당시 조성됐던 국민성금중 1백34억여원도 몇년째 은행금고에서 사장돼 있다. 북한의 금강산댐은 공사진척이 거의 없어 아직까지 본댐 축조공사를 착공도 안한 상태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송태권기자>송태권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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