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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이 없는 나라(장명수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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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이 없는 나라(장명수칼럼)

입력
1993.06.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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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월이상 포항제철에 대한 대대적인 세무조사를 벌였던 국세청은 포철그룹의 탈루세액 7백30여억원을 추징하고,전 포철 회장 박태준씨를 검찰에 고발했다. 박씨는 계열·협력사로부터 56억원의 뇌물을 받고,3백60여억원에 이르는 재산을 축적하면서 증여세 등 63억원을 탈세한 혐의를 받고 있다.새정부 출범이후 1백일이 지나는 동안 기라성같은 전시대의 인물들이 줄줄이 추락하고 있다. 박태준씨의 몰락을 보는 심정은 특히 착잡하다. 그는 1968년 황무지에서 한국의 제철업을 일으켜 20여년만에 포항제철을 세계 3대 철강회사로 키워낸 「포철신화」의 주인공이다. 그의 신화는 89년 민정당 대표로 정계에 투신하면서 금이 가기 시작했고,대선으로 가는 권력투쟁 과정에서 심각하게 깨졌다. 국세청의 이번 발표는 탁월했던 세계적 철강인의 신화가 무너져 내리는 비극적인 종말을 보여준다.

우리나라는 「영웅」이 귀한 나라다. 우리의 풍토가 영웅을 키우지 않는다고 탓하는 사람도 있고,영웅이 자라기에는 역사가 너무 가파르게 흘러왔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영웅이 없는 나라에서 지난 대통령선거를 치르며 두사람의 「영웅」이 추락했다. 무일푼의 국졸 가출소년으로 세계적인 재벌이 된 현대의 정주영씨,그리고 박태준씨가 그들이다. 우리의 풍토가 영웅을 만들지 않는다고 탓하기 이전에 그들은 엉뚱한 정치적 야망에 휩쓸려 스스로 몰락했다.

각기 자신의 분야에서 크고 작은 영웅으로 존재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한 분야에서 어느 정도 성공하면 십중팔구 정치에 욕심을 내는 것이 우리의 고질적인 병폐다. 권력을 잡아야 돈도 명예도 따라올뿐 아니라 지금까지의 성공도 유지할 수 있는 강박관념까지 있다. 「자수성가한 기업영웅」도 「세계적인 철강영웅」도 권력을 잡지 못하면 온전하게 「영웅」으로 살아남기 어렵다는 위협을 우리의 가파른 역사에서 보았을 것이다.

어떤 성공도 권력을 못잡으면 미완의 성공이라는 생각을 바꿔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크고 작은 영웅들이 먼저 역사의 격랑을 이겨낼 수 있는 도덕적인 힘을 가져야 한다. 정권이 바뀌어도 죽지않는 영웅,두드려도 먼지가 안나는 영웅,대통령이 되는 것보다 자기 일에 더 긍지를 느끼는 영웅을 우리는 기다리고 있다.

「포철신화」로 우리나라의 경제성장에 기여한 「철강영웅」을 이렇게 죽일 수 있는가하고 아쉬워하는 사람도 있고,국세청이 포항제철에 대한 조사보다 박태준 개인의 비리에 초점을 맞춘 것은 명백한 정치보복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가 진정한 영웅이기 위해서는 몇백억으로 추정되는 축재에 대해 해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는 감옥에 가게 되더라도 빨리 귀국하여 국민의 마지막 실망이라도 막아야 한다. 그 길만이 한때 자신을 「영웅」으로 불렀던 철강업계에 답하는 길이라고 믿는다.<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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