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대 총선때 40∼50명 자금지원/경선과정 민정계 상당수 추종/YS 후보결정후 “나홀로” 신세「쓰러진 철인」 박태준 전 민자당 최고위원의 사람들은 누구였는가.
정부의 철원 세무조사 결과 발표로 새삼스럽게 떠오르고 있는 관심사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박씨가 포철의 비자금중 상당액을 정치권에 유입했던게 기정사실화되면서 자연스럽게 그 혜택을 받았을 가능성이 큰 사람들에 대해서도 관심이 모아지고 있는 것이다.
정치권,특히 민자당내 민정계의 세무조사결과 발표에 대한 민감한 반응도 이런 시각도 무관하지 않은듯하다.
박씨의 정치적 「흡인력」은 그의 정치적 위상변화에 따라 강도를 달리했다. 여기에 박씨 자신의 정치적 야심의 정도가 변수로 작용했다.
박씨 정치역정의 1기라할 수 있는 11대 국회때 그는 소속 상임위인 국회 재무위의 민정당 의원들과 가깝게 지냈었다. 그가 재무위원장으로 있을 당시 민정당 의원은 정순덕 김종기 김종인 나웅배 이민섭 이자헌 정재철 정종택 유경현씨 등이었다.
박씨는 초선 재무위원장이었지만 든든한 재력과 군부와의 특수한 관계 등으로 인해 재무위를 잘 「요리」했었다.
박씨의 정치인생 2기는 민정당 대표위원을 맡게된 89년말부터 민자당 최고위원으로서 14대 총선을 치렀던 92년 3월께까지라고 할 수 있다. 박씨는 민정당 대표에 취임하면서 「정치인 박태준」으로 다시 태어났다. 이어 3당 합당으로 민자당의 민정계 관리자가 된 후에는 민정계의 「후원자」역할을 해야했다. 사실상 모든 민정계 의원이 박씨의 「우산」밑으로 들어온 셈이었다.
이 당소 평소 박씨의 방을 자주 찾아왔던 인사들은 크게 세부류. 첫째는 그가 회장으로 있던 한일 의원연맹일로 가깝게 지냈던 정석모 최운지의원 등. 또 같은 군출신이었던 김종곤 이광로 김인기 전 의원 등도 자주 얼굴을 비쳤다. 특히 지역적으로 호남지역 출신 원내·외 인사들이 박씨와 지근거리를 유지했다. 이도선 이상하 양창식 이영일 조남조씨 등이 그 예. 이밖에 노인환의원은 당재정위원장 나오연의원은 박씨와 동향(양산),최재욱의원은 박씨의 비서실장이라는 인연 등으로 해 「TJ계」로 분류됐었다.
14대 총선은 박씨에게 본격적인 「씨앗뿌리기」의 기회를 제공했다. 그리고 여기에는 그의 「대권야망」이 개입되기 시작했다는게 정설이다. 박씨 캠프는 민정계는 A·B·C급으로,민주·공화계는 D·E급 정도로 분류해 선거자금 지원을 해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로 선수별로는 초·재선 그룹,지역적으로는 호남의 넉넉지 못한 후보들이 박씨의 「A급 봉투」를 받았었다는 후문이다. S·C·L·R씨 등이 이 범주에 속했다고 한다. B급으로는 K·P의원 등이 해당됐었다는 전문이다. 어쨌든 14대 총선과정에서 박씨 진영의 「관리대상」 인원은 40∼50명을 헤아렸었다는게 공공연한 비밀로 돼있다.
14대 총선후 벌어진 민자당의 대통령후보 경선과정은 박씨의 정치인생 3기로 볼 수 있다. 대권을 향한 반공개적인 행보가 이때 이뤄졌다. 신민주계를 제외한 민정계의 상당수 의원이 그가 부르면 달려왔다. 일부는 『박 최고가 깃발을 들어야 한다』고 목청을 높이기도 했었다. 조영장 이긍규 이상득 김인영 노인환 이해구 김중위 최재욱 장경우 이성호 장영철 김한규 강우혁 김기배 이진우 김현욱 박우병 홍희표 김문기씨 등 당시 의원과 원외의 이영일 조남조위원장 박범진의원 당선자 등이 당시 박씨가 주최한 모임에 참석한 멤버들이다. 정석모 박정수 김영구 김중권 이승윤 심정구 정동성 이도선 양창식씨 등은 박씨의 북아현동 자택에서 모임을 가졌던 인사들이다.
이종찬 이한동 박준병 심명보 박철언 양창식의원은 박씨와 「반YS 7인 중진협의회」를 구성,활동을 같이했던 사람들이다.
이들 모두의 정서는 「친TJ」 「반YS」로 해석되는게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5월 전당대회로 김영삼대통령 후보가 확정되면서 박씨는 어느날 갑자기 혼자가 돼버렸다. 더이상 그를 후원자로 여기는 의원도 없었고 그가 「영양분」을 공급해줘야할 이유도 사라져버렸다.
새정부 출범후로는 아예 「고립무원」의 신세,그 자체가 돼버렸다. 그는 지금 일본에서 부인과 함께 외부와의 접촉을 일체 사양한채 신병치료에만 몰두해 있다.<신효섭기자>신효섭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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