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에서 공직자의 재산등록제를 처음 실시한 나라는 필리핀이었다. 공직자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취임과 함께 자신의 재산상황을 신고하게 되어있으나 정확하게 신고한 사람의 거의 없다시피 형식적으로 써냈고 부정부패는 더욱 기승을 부렸다. ◆하지만 죽은 법이나 다름없었던 재산등록법이 한때 실효를 본 적이 있었다. 1953년 대선에 당선한 라몬 막사이사이 대통령은 『필리핀이 사는 길은 비리척결뿐』이라고 선언,부정부패자는 물론 재산을 은폐·축소 및 허위신고한 공직자는 가차없이 의법조치하는 「청풍」을 일으켰으나 57년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그후 지금까지 필리핀이 「죽은 법」을 유지하며 부정부패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음은 잘 알려진대로. ◆지난봄 있었던 국무총리 장·차관급 국회의원 등의 재산공개는 가히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초법적인데다 「자진」 형식으로 단행됐고 부동산값 등을 제멋대로 산정하는 등 공개에 문제가 많았지만 고위공직자의 도덕성과 양심을 엿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런데 민자당의 정재철의원이 재산공개때 가족명의로 된 비상장기업 주식 12억1천여만원(액면가) 상당을 숨긴 것으로 밝혀졌다. 앞서 그는 자신의 재산을 23억2천여만원이라고 공개했으나 최근 증권감독원의 감사로 숨겨둔 재산이 들통난 것이다. 그가 초선의원도 아닌 국회 예결·재무위원장과 정무장관 등을 지낸 3선으로 민자당의 당직서열 3위라는 점에서 매우 충격적이다. ◆정 의원은 『죄송하다』며 『새 윤리법에 따라 재산 재공개때 공개할 계획이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고의적인 은폐였음이 명백하다. 하기야 가명·차명으로 그보다 더 많은 재산을 숨긴 정치인들이 아직도 얼마든지 있다는 소문이고 보면 정 의원의 경우는 조족지혈 정도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재산공개 의무를 엉성한 「필리핀식」으로 여기고 국민을 멀쩡하게 속인 책임은 면할 길이 없을 듯하다. 민자당은 정치도의와 기강확립이란 측면에서 마땅히 문책해야 하겠지만,그 이전에라도 정 의원 스스로 공직에 대한 속죄의 결단을 내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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