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시설 빈약…“전인교육은 말뿐”/전문사서 없고 자료 주먹구구 정리/일부 학교 「도서관설치 의무화」 무시폭넓은 사고력을 요구하는 대학수학능력시험 도입 등 대학입시제도의 변경에 따라 고교 독서교육의 필요성은 더욱 커졌으나 암기위주 교육으로 인해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
고교교육의 정상화를 실현하기 위해 실시되는 새 대입시제도는 학교수업 현장에 과거와는 다른 학습물결을 일으키고 있다. 변경된 입시제도에 따라 교사들 사이에서 새로운 교수법이 모색되고,학생들도 이에 맞춘 학습모델을 담고 있는 시중의 학습서들을 찾아보며 보다 효과적인 「수험대비학습」의 방식을 찾기위해 기민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같은 움직임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변화의 모습은 일선고교에서 오랜만에 일고 있는 「독서교육」에 대한 관심이다. 대학수학능력시험과 대학별고사대비 수험학습의 일부로 일고 있는 독서학습은 일선학교별로 91년부터 시작된 이래 교사와 학생 모두의 호응속에 궁극적으로는 교육정상화의 중요한 분수령이 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교육 관계자들은 과거 입시위주 교육풍토와 관계당국의 정책의지 결핍으로 사장되다시피한 독서교육이 이번에는 박제된 교과과정을 뛰어넘는 교육적 효과를 거둘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그러나 이제 다시 첫발을 내딛고 있는 독서교육은 그간 피폐된 교육환경에서 비롯된 여러가지 난관에 부딪치고 있다. 우선 고교교육 수준에 맞는 좋은 책이 무엇이며,이를 통해 어떻게 사고력을 배양할 것인가 하는 출발점부터 다져지지 않고 있다. 일선 고교에는 학생들에게 올바르고 효과적인 독서를 지도해 줄 만한 선생님과 관련 프로그램이 절대적으로 빈약하다. 도서관은 방치됐거나,대입시 학습을 위한 독서실로 변질된지 오래다. 게다가 자극적인 매스컴의 홍수 속에서 학생들은 힘들여 문자를 읽어나가려는 수고를 피하려는 경향이 농후하다.
그나마 읽는 책도 당의정처럼 간편하게 요약된 것들이거나 일부 내용이 왜곡된 것들이기 일쑤이다.
어떤 책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해 일선 고교에는 통일적인 프로그램이 없다. 서울 신일고의 경우는 학년별로 학생들의 독서범위를 문학 인문사회과학 자연과학 외국어문 등 4개 부문으로 나눈 뒤 도서선정,독서학습의 운영을 교사 10명으로 구성된 독서지도위원회에 일괄적으로 맡겼다. 91학년도부터 시작돼 1·2학년 학생 전원을 대상으로 실시되고 있는 이 학교의 독서학습을 선정도서를 평가도서와 윤독도서로 나눈 뒤,평가도서에 대해서는 학생들에게 1년에 4차례 독서보고서를 작성케해 연말 국어성적에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고교는 독서교육에 아직까지 미온적이다. 서울 M고의 한 진학담당교사는 『대학수학능력시험에 대비,학교별로 독서학습이 이루어지기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도 『그러나 학생들의 독서를 학교가 나서서 좌우할 만큼의 사안은 아닌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M고에는 독서프로그램이나 권장도서 목록 등이 없다.
독서교육을 장려할 수 있는 제도변경에도 불구하고 일선 학교가 독서교육에 적극적이지 못한 것은 오랜 입시위주 학습의 관행이 독서의 토양 자체를 황폐화시킨데 큰 원인이 있다.
91년 공표된 도서관진흥법 제5장에는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이에 준하는 각종 학교를 포함한다)에는 학교도서관을 설치하여야 한다」고 규정,학교도서관 설치를 의무조항으로 명문화하고 있다. 그러나 91년 교육부 통계에 의하면 전국 1만4백45개 초중고교중 도서관이 설치된 학교는 64%인 6천7백29개교에 불과했으며,그나마 전용도서관은 2백51개교로 전체 학교의 2.38%만이 제대로된 도서관을 보유한 것으로 드러났다.
도서관시설의 절대부족과 함께,도서관을 통해 학생들의 독서를 지도하고 독서분위기를 주도할 사서교사의 배치문제도 심각하다. 91년 현재 전국 6천7백29개 초중고학교 도서관에 배치된 사서교사수는 8백74명으로 전체의 12.9%에 불과하다. 서울 K고 사서교사 박모씨(27·여)는 『절대부족한 사서교사 가운데 상당수가 도서관학과나 문헌정보 학과를 나온 전공자가 아니며 심지어 교련교사가 사서를 대신 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도서관자료의 절대빈곤은 더욱 심각하다. 재산공개 파문 당시 김문기 전 의원이 이사장으로 돼 있는 상지대 도서관의 도서 대부분이 청계천 헌책방에서 ㎏단위로 구입한 헌책들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 충격을 주기도 했지만,고교교육 현장에도 도서자료 수준은 비슷하다. 학생들의 수준이나 학군으로 따져 신흥명문으로 꼽히는 서울 Y고 조차 학교 소장본은 1천권이 채 못되며 학생들이 기증한 3천여권도 대부분 문고판이어서 소장도서로서의 가치가 없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 참고로 91년 현재 우리나라 초중고교생 1인당 학교도서관 도서구입비는 3백72원,1인당 보유 도서수는 미국·일본의 10권에 훨씬 못미치는 2.5권이 고작이다.
그나마 있는 도서관 조차 입시 독서실로 전락한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교실 3개 크기의 도서관이 야간 자율학습실로 쓰이고 있어 자신을 「자율학습감독교사」라고 자조적으로 소개한 한 사서교사는 『학교도서실이 「독서실」로 전락한 데는 입시위주 교육에만 치중하는 학교측과 단기적 시각에 입각한 학부모 태도 모두에 책임이 있다』고 지적했다. 한마디로 학교뿐 아니라 학부모들까지도 보이지 않는 교양교육보다는 눈에 띄는 「실력향상학습」에만 매달려 있다는 것이다.
이같은 고교의 현실에서 바람직한 독서교육 방안을 모색해온 신일고 신동일교사(37·국어)는 92년에 이 학교 교지에 발표한 「학생들의 독서의식과 독서지도의 방향」이라는 논문에서 일선 학교에서의 독서부양에 대해 몇가지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논문에 의하면 조직화된 홍보활동이 필수적이다. 신학기초 오리엔테이션을 통해 독서의 즐거움과 필요성을 독서정보와 함께 알려주는 것이 독서입문의 첫 걸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신씨는 이 과정에서 대중매체의 해악과 역기능을 학생들에게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특별활동시간을 활용하는 것도 학생들의 독서진흥에 효과적이다. 입시중심의 자율학습과 정규수업시간을 독서지도에 할애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므로 특별활동시간을 독서토론,독후감 발표의 기회로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는 다른 특별활동을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희망자에 한해 실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일정한 수준에서 독서를 강제하기 위해서는 정규수업에 연결된 독서지도 방안도 모색돼야 할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그러나 신 교사가 독서교육에서 가장 강조하고 있는 부분은 학교교사들의 솔선수범이다. 신 교사는 『교사들이 독서를 정규 교육과정과 동떨어진 별개의 취미활동 정도로 인식하거나 학습능률을 저해하는 비효과적인 행태로 인식하는 한 학생들의 건강한 독서활동은 기대할 수 없다』고 잘라 말한다. 신 교사는 『질적으로 우량한 독서는 전인교육 차원에서 정규 교육과정 전체와 맞먹는 잠재적 교육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말했다. 독서교육은 대학수학능력시험의 대비학습이 아닌 중요하고 독립적인 교육단위로 활성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신일고는 이렇게 한다/10인 교사위원회서 책선정등 총괄 운영/학생들에 연 4차례 독서보고서 제출케
91년 1·2학년 학생을 대상으로 시작한 신일고(교장 김삼열)의 독서지도는 그 체계와 활동에서 근래 고등학교 가운데서 드문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학교측은 8개 과목 10명의 교사를 뽑아 독서지도위원회를 구성하고 도서의 선정부터 독서프로그램의 실시에 이르기까지 독서지도의 전과정을 위원회에 일임했다. 독서위원회는 1년을 36단계로 세분,독서활동 프로그램을 짜고 있으며 1년에 4차례의 독서평가를 실시,연말 국어성적에 20점을 반영한다.
독서지도는 개인별 독서와 집단독서 등 2개 부문으로 나뉘어 실시되고 있는데 평가도서와 윤독도서가 각각 선정된다.
학생들은 1년에 4권의 평가도서를 개인적으로 일고 내용요약과 비평이 곁들인 독서보고서를 분기별로 제출해 평가를 받는다.
반면 윤독도서는 각 학급의 HR조직을 이용,8개의 독서클럽을 구성한 뒤 선정도서에 대한 토론을 자연스럽게 유도한다. 평가도서가 강제되는 독서지도라면 윤독도서는 보다 탄력적인 지도인 셈이다. 독서지도위원회는 매년 1·2학년 윤독도서 목록을 발표해 학생들의 독서를 책임있게 지도하고 있다.
윤독도서는 학생들에게 독서의 흥미를 유발하면서도 교양적 가치가 있는 책들로 문학,인문·사회과학,자연과학,외국어문 등 4개 부문으로 나눠졌다.
그러나 신일고의 경우도 3학년에 대한 독서지도 프로그램은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대입시를 준비해야 하는 수험생들까지 독서지도를 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렵기 때문이다. 이런 고충이 독서지도의 한계를 긋게 한다.
□특별취재반
▲사회부:설희관차장·김현수·장인철·여동은·남경욱·이진동·현상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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