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5월31일 하오 워싱턴 캐피틀힐(의사당)의 하원 본회의장은 거의 모든 의원들이 출석한 가운데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4시 정각이 되자 단상의 짐 라이트 하원의장이 개회선언에 이어 자신의 신상발언을 하겠다고 양해를 구했다.『본인은 나의 생애에 있어 가장 중대한 결심을 밝히려 합니다.… 「명성은 안개와 같은 것,인기는 허망한 것,그리고 어제의 환호는 오늘의 저주로 변한다」는 말을 요즘처럼 절감한 적은 없습니다. 본인이 지난 1년간 견딜 수 없는 모욕과 터무니없는 공격을 받은 것은 세상이 잘 알고 있습니다. 억울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 의사당에서 서로를 잡아먹는 보복의 식인풍습은 사라져야 합니다. 본인은 여러분이 준 이 자리를 다시 돌려드리고자 합니다』
1시간동안 분노와 회한에 찬 신상발언을 한 라이트 의장이 울먹이며 정계은퇴를 선언하자 모든 의원들은 기립,박수로 위로했다.
텍사스주 출신의 라이트 의장은 34년 연속당선에 의해 의원생활을 해온 하원의 터줏대감이었고 또 전후 샘 레이번,존 매코맥,칼 알버트,토머스 오닐에 이어 의장을 맡아 온 민주당의 당수격이었다. 공화당 출신의 조지 부시 대통령과 당당하게 맞설 수 있는 인물이 돌연정치와 결별한 것은 와병이나 명예은퇴가 아니고 비리로 인해 어쩔수 없이 물러나게 된 것이어서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1년전 하원윤리위원회가 그의 비리문제를 다루기 시작하자 라이트 의장은 『정치적 모략이다. 입법부 수장의 명예를 걸고 떳떳함을 증명하여 여러사람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겠다』고 펄펄 뛰었으나 1년만에 윤리위가 69건의 비리사실을 확인하자 의장과 의원직 사퇴 및 정계은퇴를 선언한 것이다.
비리중 가장 큰 것은 그가 동향의 실업인(조지 말리크)의 회사에 부인이 일도 하지않고 취업한 것처럼 위장해서 10년간 14만5천달러 상당의 급료와 고급승용차,콘도미니엄 이용 등의 혜택을 받고도 신고하지 않았고 자신의 저서 수천권을 친지들에게 팔아 법정한도 이상의 수입을 올린 것이다. 한마디로 1백달러 이상의 선물 등을 받으면 신고해야 하는 규정을 어긴 것이다. 사실 우리나라의 권력형 비리에 비교하면 조족지혈격이지만 높은 도덕성이 요구되는 의장직이어서 탄핵되기 전에 선뜻 물러난 것.
공직자 재산공개 파문으로 김재순 전 국회의장 등이 정계를 떠난데 이어 박준규의장이 의장직을 사퇴했다.
김·박 두 전 의장으로서는 재산공개로 자신들이 마치 부정축재의 주역처럼 떠오르고 명예가 크게 손상된데 대해 매우 불쾌하고 억울할 뿐더러 여러사람이 원망스럽기만 했을 것이다. 재산의 취득경위와 과정이 조사된 후 밝혀져야 하는데도 「유전유죄」처럼 공격의 대상이된데 분노를 느꼈을 것이다. 또 이것이 자신들을 여론재판으로 밀어내려는 정치적 작용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가졌을 것이다.
하지만 엄청난 충격을 받고 놀라고 분노하기는 국민쪽도 마찬가지였다. 두분이 어떤 분인가. 40여년간 정치를 해온 7∼8선 의원으로 온갖 풍우를 맞고 쓴맛 단맛 다본 원로 아닌가. 원숙한 경험과 경륜을 지닌 군계일학과도 같은 원로여서 더욱 존경했기 때문에 재산이 공개되자 내용에 참으로 놀랐던 것이다.
사실 김·박 전 의장은 과거 집권당이었던 공화당의 요직을,특히 박 전 의장은 집권당 의장을 지냈기 때문에 한 정권의 역사적·특대적 책임을 진다는 면에서 정치에 복귀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렇게했을 경우 오늘과 같은 구차스런 일도 따가운 질책도 겪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박 전 의장의 착잡한 심경은 이해하지만 국회가 개회중인데도 해외로 나간 것은 지극히 잘못된 행동이 아닐 수 없다.
국회의원의 가장 큰 임무는 의정활동으로 국회가 열리면 밖에 있더라도 즉각 귀국해야 함에도 나간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 박 전 의장과 정동호의원은 서둘러 귀국,소임을 다해야 한다.
권력형 비리가 판을 쳤던 우리 수준에 비하면 「별것 아닌 수입」(?)을 좀보고 혹시나 의회의 권위와 명예에 흠이 갈끼보아 홀연히 정계를 떠난 라이트 의장의 자세가 새삼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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