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상 못받아 “재정바닥”/불안·무력감등 정신적 후유증 심각/「단합·정치력 획득」 뼈아픈 각성 얻어LA교포 지니 하씨(44·여)는 지난해 4·29폭동 당시 여섯형제와 가족들의 생계가 모두 걸린 주류판매상점을 잃고 이민생활 20여년만에 가장 큰 좌절에 빠졌다. 하씨는 주의의 격려로 다시 재기에 나서 지난 연말 정부의 피해융자금 25만달러를 받아 불탄자리에 다시 가게를 열었다. 하씨의 새 가게는 미국전체,특히 캘리포니아지역의 지독한 불경기속에서도 최근 폭동이전 매출액의 90%까지 회복,폭동의 후유증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그러나 LA 교포사회에서 하씨의 경우와 같은 재기성공담은 거의 듣기가 힘들다.
번듯한 업소를 운영하던 수많은 교포들이 하루아침에 생활터전을 잃고 불안전한 일용직 근로자로 전락했거나 아직도 일자리와 가게터를 찾아다니고 있는 실정이다.
폭등이 휩쓸고 지나간 LA 사우스 센트럴의 흑인지역이나 코리아타운 1년이 지난 지금도 곳곳에서 검게 타버린채 방치돼있는 흉한 몰골의 상점터들이 눈에 뜨인다.
지난해 4월29일 흑인 로드니 킹 구타경찰관에 대한 지방법원의 무죄평결을 계기로 LA 일원의 흑인과 남미계 폭도들은 연 3일에 걸쳐 사우스 센트럴과 코리아타운 일원에서 무차별 파괴와 약탈을 자행했다.
뒤늦게 미정부가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경찰과 주방위군을 투입해 진압에 나섰으나 이미 폭동은 가뜩이나 불황에 허덕이던 LA 경제전체에 치명상을 입힌 뒤였다.
최근 한인청소년회관 등의 조사에 따르면 피해 한인들의 불과 28%만이 재기에 성공한 것으로 나타났으며 70% 이상은 장래의 재기조차 비관적으로 보고 치명상을 입은 것이다.
미국내 소수민족중에서도 남다른 생활력과 지적능력이 평가되는 한인사회의 회복세가 지지부진한 이유는 여러가지다.
무엇보다 피해보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신규사업을 벌일 재정적 기반을 잃은 점이다. 최근 한 조사에서 재정난을 극복한 한인업소는 불과 0.4%로 나타나기도 했다.
가장 즉각적인 피해보상은 보험인데 불행히도 폭동당시 한인 피해업소의 3분의 1 정도만이 보험에 가입하고 있었다. 현재까지 이중 61%가 보험료를 신청했고 또 이중 절반정도만 보험료를 지급받아 결국 피해업소 10% 정도만 보험혜택을 받은 꼴이다.
본국의 국민들이 모아보낸 4백50여만달러를 포함,모두 1천1백여만달러 규모의 성금도 정신적으로는 큰 위안이 됐다. 그러나 피해자 1인당 3천여달러의 금액은 현실적 피해를 극복하기에는 너무 적었다.
「4·29폭동 한인피해자협회」와 「피해자식품상협회」 등은 시정부 등을 상대로 소송을 통한 보상을 모색하고 있으나 승산이 희박한데다 워낙 장기간이 소요돼 전망은 그리 밝지 않은 형편이다.
피해자들이 자금을 구하지 못해 제대로 재정착하지 못하는 현실은 한인타운 전체의 불황을 가속화시키고 이 때문에 다시 투자심리가 위축되는 등 악순환을 거듭하고 있다.
매년 급성장세를 보여온 코리아타운의 신규업소 개점률이 지난해 처음으로 전년대비 25%나 감소했다. 한인 은행들의 예금고도 감소추세로 반전되고 대출업무는 거의 손을 놓은 실정이 됐다.
코리아타운 경제에 큰 활력소로 작용해오던 본국 관광객이나 방문객도 전반적인 LA의 불안한 분위기에 영향을 받아 격감,여행사 등도 타격을 받고 있다.
폭동의 피해는 경제뿐이 아니다. 수많은 교포들이 심각한 정신적 후유증을 앓고 있다.
폭동후 피해자들의 정신건강 상담을 주로 맡고 있는 「아시아태평양 상담치료센터」에는 지난 1년간 교포 5백50여명이 찾아 정신적 고통을 호소했다. 정신과 상담을 꺼려하는 한국인들의 일반적 성향에 비추어 볼때 결코 작은 숫자는 아니다. 이들은 주로 불안감,불면증,무력감 등 통상적인 스트레스성 정신질환을 호소하고 있으나 악몽에 시달린다는 중증도 10명에 1명꼴이나 됐다.
그러나 비온뒤에 땅 굳는다는 말처럼 4·29폭동이 교포사회에 끼친 긍정적 자극도 간과할 수 없다.
그동안 모래알처럼 흩어져 각자의 경제기반 마련에만 진력해온 교포들이 폭동을 계기로 모처럼 단합된 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으며 「경제력에 걸맞는 정치력 획득」의 필요성을 뼈아프게 자각하게 된 것이 그 대표적 사례다.
폭동이후 학술세미나와 예술공연 등을 포함,사회·종교·교육·문화 등 다양한 분야별로 인종화합 행사를 열어 타민족을 이해하고 공존하기 위한 노력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교포사회에는 또 지난해 김창준씨의 연방 하원진출을 계기로 정치적 힘을 결집해 공동의 이익을 추구해야 한다는 인식이 폭넓게 확산되고 있다.
한마디로 전체공동체로서의 한인사회란 개념에 개안했다는 것이 가장 큰 성과로 지적되고 있다.
다행히 지난번 로드니 킹 연방재판 평결이후 코리아타운을 중심으로한 주변경기도 호전되는 분위기가 나타나고 있다.
상권이 현재 코리아타운의 중심인 올림픽가게에서 점차 북쪽으로 옮아가는 현상도 눈에 띄고 있다. 흑인 등 빈민층 대상의 소매업 위주에서 백인주류사회를 겨냥한 제조업 위주로 전체적인 업종을 전환해야 한다는 필요성도 강조되고 있다.
지난 60년대 와츠폭동을 계기로 유대인들이 흑인지역을 벗어나 한차원 높은 발전을 이룩했듯 한인들도 4·29폭동을 발전의 계기로 활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한인사회에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많은 교포들이 지난 폭동으로 엄청난 재난과 좌절을 겪었으나 그들 대부분이 맨손으로 「미국의 꿈」을 일구어냈듯 재기의 희망을 결코 포기하지 않고 있다.
그들의 노력여하에 따라 4·29폭동은 한세기에 육박하는 미국 이민사에서 한인들의 위상과 면모를 근본적으로 바꾼 도약의 대전환점으로 기록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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