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학군간 교육여건 “득보다 실”/시행 20년… 오히려 불균형만 초래/교사학생시설 격차 더욱 심해져/일부선 “인재양성 위해 입시제 부활하자” 주장도고교간 교육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도입된 고교 평준화제도가 시행 20년이 다 되도록 취지를 달성하지 못한채 갖가지 부작용을 낳고 있어 근본적인 대책마련이 급하다.
고교 경쟁입시로 인한 중학교육의 파행적 운영과 고교간 질적수준의 차를 극복하기 위해 지난 74년 도입된 고교 평준화제도에 대해 일부에서는 과열과외,고입 재수생 누적,대도시 인구집중 등의 문제를 해결하면서 이미 정착단계에 들어섰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학생의 학교선택과 학교의 학생선발권을 제한하고 학력의 하향 평준화를 초래,우수인재를 기르는 교육의 수월성 기능이 위축되고 있다는 비판을 면치 못하고 있다.
또 무시험 추첨배정 방식의 전제조건으로 선행되어야 할 학교간 교육여건의 평준화가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학교간 평준화가 학생들의 학력격차를 유발,교사들의 수업 목표설정이 어려워지고 사립학교 교육이 위축되는 등 부작용도 나타나고 있다. 게다가 학교마다 건학이념에 맞는 특색있는 교육을 실시,다양한 가치관을 전수해야할 고교 교육을 획일적인 입시교육 위주로 편향되게 만드는 역기능도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74년 당시 서울과 부산에서 시작된 이 제도는 80년대 들어 도청소재지급 21개 지역으로 확대된 뒤 90∼92년에 군산 안동 목포 이리 춘천 원주 등 6개 지역이 해제돼 현재 평준화 지역은 서울 부산 대구 인천 광주 대전 제주 전주 마산 청주 수원 성남 천안 진주 창원 등 15개 지역에 국한되고 있다.
평준화 정책에서의 평준화란 크게 학생,교사,시설 등 세가지 측면에서 고교간 격차를 해소한다는 것이다.
학생의 평준화는 추첨배경에 의해 입학생의 평균학력에서 고교간 차이를 없애는 것을 뜻하고,교사 및 시설의 평준화는 전반적인 교육여건의 격차를 해소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아직도 이들 세측면의 평준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 높다.
우선 학생을 추첨으로 배정,우수학생이 모든 학교에 골고루 이루어졌다고 하지만 지역에 따라 학교간 학생의 질적차이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서울의 경우 강남과 강북의 차이가 뚜렷하다.
서울 강남 H고의 홍모교감(58)은 『연합고사 성적 1백90점 이상의 우수학생이 강북의 경우 한 학교에 10∼20명이 배정되는데 비해 강남 8학군에서는 50∼1백명이 배정되는 것이 보통』이라며 『따라서 대학진학률에서도 지역간 차이가 나타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또 부모의 학력,직업,소득수준 등에 격차가 있는 대도시와 중소도시,농촌간에도 이 차이는 어쩔 수 없이 나타난다.
서울 S여고 박모교사(51)는 『대입시에서 명문대 합격자를 많이 내는 신흥 명문고교가 존재하는 현재의 상황에서 평준화가 제대로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없다』며 『고교간 교육수준의 평준화는 요원하다』고 지적했다.
상위권 대학들이 고교 내신성적을 학생 선발기준으로 신뢰하지 않는 것도 이때문이다.
또 학교간 학생의 평준화는 고교 진학율을 높여 교육기회의 확대에 깅했다는 긍정적 평가를 받고있지만 한편으로는 학력에 맞는 효율적인 학교수업이 어렵다는 또 다른 숙제를 안겨주었다.
서울 K고 김모교사는 『연합고사 성적 1백90점 이상의 우수학생과 커트라인을 간신히 넘긴 열등학생을 한 학급에 모아놓고 수재와 지진아에게 똑같은 내용의 수업을 하고 있는 것이 현재의 상황』이라며 『학생들간의 실력차가 커 수업기준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교사들이 고민할 수 밖에 없다』고 털어놨다.
S여고 정모교사(49)는 『특히 국어 영어 수학 등 대입시 주요과목에서 학생들간의 실력 편차가 심하게 나타난다』며 『이들 과목에서는 학습진도를 한반 50명중 20등 정도의 학생에 맞출 수 밖에 없어 25∼30명 정도만 수업을 따라오고 나머지 학생들은 사실상 포기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J고 영어담당 이모교사(26)는 『고1의 경우 최하위는 중1 수준을 맴돌지만 최고수준은 고 2,3정도나 될 정도로 실력차이가 있다』고 지적,『교과서 수준을 넘어선 학생들에게는 다른 책으로 공부하는 것을 허용할 수 밖에 없고 하위권 학생들은 수업을 따라오지 못해 수업분위기가 산만해지기 십상』이라고 말했다.
상위권과 하위권 학생들이 정상적인 수업과정에서 배제되고 특히 하위권 학생들의 대학진학을 위해 자리나 채우는 들러리에 머물러 교욱의 질이 떨어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경쟁입시에 의해 처음부터 능력별로 학교를 선택하게 하면 수준에 맞는 수업으로 정상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는데 평준화 제도로 인해오히려 희생되고 있다는 것이다.
학생 평준화의 전제조건인 교사와 시설의 평준화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사립고교의 주 수입원인 수업료가 국·공립학교 수준으로 동결돼 있어 재정난이 갈수록 심화,평준화의 본뜻을 퇴색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
사립고교의 재정난은 공사립고교간 학생 1인당 공교육비 비교에서 잘 나타난다. 평준화 이전인 지난 70년 국·공립고와 사립고의 1인당 공교육비는 각각 3만1천3백원과 3만2천5백원으로 사립이 많았지만,80년도에는 각각 29만7천원과 21만7천원으로 공립이 8만원 많았고 92년도에는 각각 1백64만원과 93만4천원으로 71만원의 차이를 보여 날이 갈수록 사립고교의 재정이 취약해져가고 있다(한국교육개발원 92년 통계).
이같은 재정난은 곧바로 교사와 시설의 질 저하로 나타난다.
지난해 전교조가 서울시내 1백89개 사립 중고교를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의하면 교사의 법정 정원수를 채운 학교는 단 한곳도 없었다.
또 대학을 갓 졸업한 2급 정교사와 3년 이상의 경력을 지닌 1급 정교사의 비율에서도 사립고교가 국·공립고교에 비해 2급 정교사에 의존하는 비율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 역사가 오래된 사립고교들의 경우 시설이 노후화돼 있지만 막대한 투자비용을 충당할 방법이 없어 강남의 신흥 고교와 교육여건에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고교 평준화의 또 하나의 큰 문제는 사립학교의 존립근거인 건학이념을 상실해가고 있다는 점이다.
학교의 학생선택권이 허용되지 않는 상황에서 사립고교 특유의 교육과정 운영이 어려워 학교의 설립취지를 살릴수 없다는 것이다.
이같은 부작용을 해소하기 위해 지난 90년에는 서울의 경우 특정 학군내에서 고교입시를 부활하는 방안이 정부차원에서 검토된 바 있지만 정착단계에 접어든 평준화제도를 무너뜨릴 경우 더 큰 혼란을 가져올 것이라는 정책 판단과 과열입시를 우려한 여론의 힘에 밀려 백지화됐다.
당시 한국교육개발원의 여론 조사결과 학부모의 57.2%,교사의 43.2%가 고교 평준화제도 유지에 찬성한 반면 경쟁입시 부활에 대해서는 학부모의 13.8%,교사의 24.3%만이 찬성했다.
연세대 한준상교수(교육학과)는 「좋은 교육=대학진학」이라는 등식이 보편화된 현재의 상황에서 평준화제도의 폐지가 효과를 거두긴 어려운 것이라고 전제,『교육의 질을 개선하려는 고교의 노력을 전제로 교사의 질,시설,재정 등 「조건의 평준화」를 위한 정부의 배려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교육개발원 김영철 수석연구위원은 『15개 평준화 지역중 특별시와 직할시에는 평준화 해제가 어렵지만 기타 지역은 해제 가능성을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이라며 『평준화 해제가 어려운 지역은 학교간의 평준화가 실질적으로 이루어지도록 제반여건을 조성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특별취재반
설희관차장·김현수·장인철·여동은·남경욱·이진동·현상엽기자(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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