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일 발표된 옐친의 「특별통치」 선언은 러시아는 물론 전세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지만 선언에 담긴 포고령의 실체가 무엇인지에 대한 판단이 엇갈려 혼란스러울 정도로 의견이 분분하다.이같은 혼란은 옐친의 소위 직할통치선언이 사전 녹화돼 TV로만 방송됐다는데서 출발한다. 옐친의 대통령 포고령은 아직 공식 문서로 공개되지 않았다.
과연 그런 공식문서를 작성했는지 조차 현재로선 의문시되고 있다. 문서가 없으니 옐친이 서명을 했는지도 물론 알 수 없다.
비상조치선언에 대한 대응책을 논의하기 위해 21일 긴급 소집된 러시아 최고회의는 소집 당시만해도 당장 옐친을 탄핵할 것처럼 기세등등했다. 최고회의 석상에서 강경보수파들은 옐친 제거를 위해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야 한다고 난리법석을 떨었다.
그러나 회의가 끝난뒤 최고회의가 내놓은 대응은 「옐친이 헌법을 위반했다」는 단 한문장의 공식언급과 헌법재판소에 옐친 발언의 위헌여부 심판을 요청키로 결의했다는 것이었다. 의회가 당초의 기세와 달리 즉각 옐친 포고령의 무효화를 결의할 수 없었던 것은 공식문서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실체가 없으니 자신들이 사용할 수 있는 합법적 무기인 무효화 결의투표도 불가능했던 것이다. 심지어 최고회의는 현행 헌법상 대통령을 탄핵할 수 있는 유일한 기구인 인민대표대회의 소집도 결의하지 못했다. 『법적절차를 따질 것도 없이 옐친을 즉각 제거하자』는 강경파의 요구에 대부분의 대의원들이 주춤했기 때문이다. 탄핵의 전단계인 헌법재판소의 포고령 위헌심판도 쉬 결론이 날 것 같지 않다.
사태해결의 열쇠를 쥐고 있는 헌법재판소는 22일 비상통치선언에 관한 해명을 듣기 위해 옐친에게 소환명령을 내렸지만 옐친은 이에 응하지 않고 있다. 심지어 옐친은 포고령과 관련된 헌법재판소의 서류제출 요청에도 묵묵부답이다. 따라서 헌법재판소도 난감하기는 매한가지인 것이다.
결국 초점은 옐친의 포고령이 노리는 바가 무엇인지에 모아진다. 노련한 옐친은 자신의 포고령이 위헌시비를 불러일으키리란 점을 사전에 알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따라서 공식문서를 「적」의 손에 넘겨주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비상통치선언이후 미국을 비롯한 서방이 보이고 있는 반응은 옐친의 노림수를 가늠할 수 있는 단서를 던져준다. 미국정부는 옐친이 자신의 신임여부를 국민투표에 회부했고 인민대표대회를 해산하지 않은 점을 애써 부각시켜 평가하고 있다. 미국측은 이와함께 비상통치 기한을 오는 4월25일까지로 한정한 사실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백악관측은 비상통치선언 사실을 러시아측으로부터 사전통보받지 못했다고 말했지만 미국을 비롯한 서방 주요국들이 선언배경을 사전에 상세하게 설명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이 과정에서 선언내용은 물론 방식까지 전달됐을 것으로 보이며,그 결과는 옐친의 애매모호한 TV연설로 나타났다.
옐친의 대국민연설은 행간을 읽는 쪽에서 보자면 의회기능 정지 등 「계엄」에 다를바 없는 조치로 해석되고 있지만 문자 그대로 읽는다면 무엇을 하자는건지 모를 정도로 애매하게 돼있다. 보수파들이 즉각적인 보복책을 마련하지 못한채 당혹해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홍희곤기자>홍희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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