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을 떠나던 날 조순 전 총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려 했다.『홀가분하다. 아쉬움은 없다…』 15일 아침 한은을 떠나면서 그가 남긴 말은 평범한 두세마디뿐이었다. 그는 기자실에서도,이임식장에서도 미리 준비된 원고만 읽고 말았다. 이임식장 밖에 도열해 있던 행원 하나가 떠나는 총재에게 오열을 터뜨리며 큰절을 올렸고 환송나온 모든 한은맨들은 울먹였지만 그대로 그는 이렇다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옳은말 잘하는 드문 인물이었다.
「돈풀어 증시를 부양해서는 안된다」 「금리인하보다 인플레 체질개선이 더 급하다」
한은 특융,금리인하 등 현안이 부각될 때마다 한은은 제 목소리를 냈고 결국 그게 화근이 됐을지도 모른다.
그는 새정부가 경질시킨 여느 인사와는 다르다. 취임시 9.3%에 달하던 물가는 4.5%로 안정됐고 국제수지적자는 절반으로 줄어드는 등 안정성장의 기반을 다지는데 기여했다. 통화가치 안정이라는 책임이 주어진 한은 총재역할을 제대로 해낸 것이다. 더구나 그의 평소 철학인 「경제안정속의 금융개혁」은 새정부의 공약과도 들어맞는 것이었다.
원래 어느나라든 정부와 중앙은행은 티격태격한다. 중앙은행은 통화안정만을 고집하지만 정부는 돈관리는 물론,나라살림 전체를 봐야하기 때문이다. 클린턴 행정부는 중앙은행이 하도 말을 안듣자 중앙은행 예산을 삭감해버렸고,일본 정계 실력자는 금리인하 반대를 집요하게 고집하는 미에노 일은 총재의 『목을 치겠다』고 공언한바 있다. 그러나 이들 나라에선 물론 남미같은 후진국에서도 말 안듣는다고 중앙은행 총재를 바꿔버린 적은 없다.
우리 경제가 기로에 설 때마다 무게중심을 잡아주던 그였기에 한은 사람들은 「옹졸한 인사」에는 투쟁밖에 없다며 청와대앞 가두행진을 벌이기로 했고 대학교수들마저 그의 퇴진을 아쉬워하며 조직적인 반발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런 세속의 무성한 말들을 뒤로하고 노학자는 『서재에서 왔으니 서재로 돌아가야지』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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