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며칠뒤면 그토록 고대했던 문민정부가 출범한다. 오랜 권위주의의 정권의 붕괴와 민주화과정에서 생겨난 귀중한 정치적 수확물이다. 아무리 냉소적인 사람이라도 지난 70·80년대의 암울했던 시점을 일순 회상해 본다면 신정권의 의미를 과소평가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찬반이 있을 수 있고 사랑과 미움의 엇갈림도 없지 않을 것이다.○국민은 변화를 원한다
그러나 예측하기 어려운 세계정세의 격변속에서 그 어느 때보다 국내 통합이 절실히 요망되는 이 시기에 이 정도의 정권을 창출할 수 있는 것만해도 우리 국민의 저력과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갖기에 충분하다. 동기의 선악보다 결과의 의미를 중시하는 냉혹한 정치현실에서 볼때 김 차기 대통령은 살아남은 지혜와 시의에 맞는 결단력의 면에서 비범한 능력을 발휘했음에 틀림없다. 그러기에 서슬이 시퍼런 경쟁자들이 승복도 하고 은퇴도 하고 뿔뿔이 헤어져 버리지 않았는가.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김 차기 대통령은 오랜 야당 지도자로서 어려운 고비마나 큰 문제들을 제기해왔으나 실제로 국민의 생활에 필요한 최우선 순위의 정치과제를 선택하여 이를 실천하고 그 결과에 책임을 지는 일상 정치의 경험이 없었다. 바로 이제부터 그는 온 국민의 기대속에 문제해결 능력을 시험받게 된다. 지금까지 각계에서 수많은 요구와 주문이 쏟아져 나왔고 격려와 예찬의 대통령론도 적지 않았다. 이러한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당국에서는 실로 엄청난 정책과제들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공약이 될 공약은 하지 말아야 하며 너무 원론적인 호언장담은 끝내 국민의 실망을 가져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육감으로는 김 차기 대통령이 종래의 지도자와는 다른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여기에 나는 새 정권의 방향내지 행동반경을 제시하는 기본틀에 관해서 한마디 하고싶다. 김 차기 대통령은 최근 수년간 일관해서 안정과 개혁 또는 안정속의 개혁이라는 정치적 상징을 구사해왔다. 그런데 정작 많은 국민은 안정의 참다운 의미와 개혁의 수준에 대해서 구체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지 않다. 안정이 과연 무엇이며 개혁은 어느 정도로 하는지,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안정과 개혁은 어떤 관계에 있는지 이젠 좀 뚜렷한 선이 나와야겠다.
선거과정엔 안정과 개혁의 관계를 애매모호하게 함으로써 현상유지를 바라는 사람들과 개혁을 지향하는 사람들에게 다같이 신뢰감을 줄 수 있었다. 그러나 신정권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는 지금,우리 국민에게 예측 가능한 명확한 메시지를 보내는 것은 지도자의 의무이다. 요즈음 일부 체제변혁론자들은 처음부터 안정속의 개혁이라는 정부 여당의 전략을 믿으려 하지 않으면서도 세계적인 탈급진화 추세에 망연자실하고 있고 기득권의 보호에 전전긍긍하는 수구세력들은 그저 운동권 학생과 노동자들이 거리로 나오지 않는 정도의 「안정」에 자족하여 신정부가 감행할지도 모를 개혁의 파고를 내심 두려워하고 있다. 지도자의 통찰력과 결단이 필요한 것이 바로 이 때문인 것이다.
우리 국민은 분명히 새로운 변화를 바라고 있다. 그런데 이 변화는 결코 체제의 혁명이 아니라 바로 그 체제를 위한 개혁인 것이다. 잃을 것이 많은 사람을 최소화하는 것은 정지의 기본이나 모든 계층,모든세력에 같은 농도의 만족을 줄 수 있는 정책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시점에서 안정과 개혁을 따로따로 병렬시킨다든가 개혁은 안정속에서 해야 한다는 등의 수사는 이제 호소력이 없다. 신정권이 내세울 정책의 기본선은 개혁을 통한 안정이라야 한다. 개혁은 안정의 조건이며 수단이고,인정은 개혁의 결과이며 목표이다. 여기서 말하는 안정은 기득권층의 현상유지의 맥락에서 이해된 위로부터의 경직된 「안정」이 아니라 사회 각 부문이 살아 숨쉬는 동태적인 안정이다. 이 안정은 결국 건강한 민주자유시장체제의 정착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의 체제는 지난 반세기동안 이런저런 이유로 너무나 왜곡되고 그것이 변칙과 부패의 축적으로 이어졌다.
○개혁은 안정의 조건
김 차기 대통령의 어록 가운데 늘 나오는 것이 다름 아닌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것이다. 이 말은 위에서부터 자각적으로 개혁해야 아래도 자발적으로 개혁한다는 표현으로 바꾸어 볼 수 있다.
우리 사회는 지금 그야말로 문자 그대로 구조적인 부패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어느 사회나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부패가 있게 마련이나 우리 사회의 부패는 분명히 허용의 한도는 넘어선지 오래다. 실타래처럼 꼬여 있어서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지 알 수 없다. 총체적 부패라고 하지만 나라의 기둥을 흔들어 놓은 것은 특히 지도층의 부패이다. 정계·관계·재계·언론계·교육계 등 오늘날 우리의 사회지도층 가운데 엄밀한 의미에서 구조적 부패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이 얼마나 될까. 자기성찰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다.
역사적 경험에서 보면 극한적 부패의 수술은 가끔 혁명이나 전쟁으로 청산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시대정신에도 맞지 않고 현실성도 없을 뿐만 아니라 체제의 안정이라는 국가목표와도 모순된다. 따라서 안타까운 일이지만 우리 사회의 부패문제를 일거에 해결하는 왕도나 첩경은 없다. 수많은 비리와 부정의 항목을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우선순위를 정한 다음 과감한 개혁을 통하여 시정 가능한 것은 신속히 시정하고 시간과 비용을 요하는 항목은 법의 공평한 적용한 제도의 효율적인 운용을 통하여 점진적으로 해결해가는 길 뿐이다.
이미 우리는 교과서적인 문제제기나 무책임한 미사여구에 식상해 있다. 좋은 말이 너무 남발되는 바람에 그 참뜻이 풍화되어 버렸다. 따라서 백마디 말보다 하나의 행동이 요망된다. 이를테면 부패와 무관할 수 없는 많은 관행들도 이제 떨쳐버려야 한다. 하나의 비근한 예를 들면 대통령부터 화한을 아예 보내지 않거나 최소한으로 자제해야 한다. 화한은 예절로서의 의미보다 이미 허례의 표본이 된지 오래다. 관혼상제에 가서 이 낭비의 현장을 보고 한번쯤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없건만 다들 타성적으로 따라가고 있다. 그리고 출처모를 돈들을 그렇게 뿌려대면서 어떻게 정치부패를 막겠다고 말하는가. 돈안드는 선거에 대한 국민적 합의는 이미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남은 것은 실천 뿐이다. 그것도 집권초기,가능하다면 1백일안에. 사려깊고 현실성있는 연구를 토대로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선거비용이 가장 적게 들게 하는 공적만 세워도 역사에 길이 기록될 것이다.
○새시대의 여명을 열자
우리 앞엔 수술이 어려운 만성병과 같은 부패도 적지 않지만 의지가 있고 타이밍을 잘만 선택하면 개혁할 수 있는 것도 수없이 많다. 좀 낭만적으로 표현하면 우리는 지금 구시대의 황혼에서 새시대의여명을 맞으려는 전환기에 서있다. 그런데 이 새시대를 열어나갈 사람,즉 개혁을 통한 안정의 주체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 「인사가 만사」라고 믿고 있는 김 차기 대통령의 고뇌와 자질의 첫 관문이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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