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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투표 연기 제안 조르킨 헌재소장(월드리포트 2월1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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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투표 연기 제안 조르킨 헌재소장(월드리포트 2월13일자)

입력
1993.02.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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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 보­혁대결 중재나선 “해결사”/각종 법령 위헌판결 진가 발휘/변혁기 사법부 독립 주역/공산당시절 무명 “대기만성형”발레리 드미트리비치 조르킨 러시아 헌법재판소 소장. 49세. 러시아의 첨예한 보혁대립을 교통정리하겠다고 나선 인물이다.

그의 사무실에는 지평선에 걸려있는 태양이 인상적인 러시아 전원풍경화 한점이 걸려 있다. 『그림의 태양이 지는 해로 보이느냐,떠오르는 태양으로 보이느냐. 러시아의 현 상황은 지평선위에 걸린 저 태양과 같다. 러시아의 앞날은 우리의 손에 달려있다. 천당이냐 지옥이냐의 갈림길에 서 있다』

소련붕괴후 혼미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러시아를 민주적 법치국가로 이끌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그에게는 이러한 현상인식이 숨어있다.

그는 대기만성형이다. 공산당 시절 별 볼일 없는 법학자였지만 40대 후반돼서야 진가를 드러냈다. 지난해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과 의회 보수세력이 생사를 건 충돌로 치달을 때 파국직전에 이를 중재하는 정치적 수완을 발휘했다.

당시 러시아의 정국은 마주보고 달리는 두대의 기관차가 충돌하기 직전과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의회는 옐친을 불신했고 옐친은 의회 해산을 위한 국민투표를 선언했다. 쿠데타 소문은 끊이지 않았고 군부와 정보기관은 동요했다.

조르킨의 중재는 옐친과 루슬란 하스불라토프간의 극적인 화해를 유도했고 양측은 결국 4월11일 개헌을 위한 국민투표에 합의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조르킨은 일약 「러시아의 해결사」로 부상했다.

조르킨은 사법권 독립을 맨몸으로 지켜낸 현실적인 법학자다. 소련붕괴 두달전인 91년 10월 신설된 헌법재판소 소장직을 맡자마자 정부 법령의 위헌을 선언,과감한 법률개정을 단행했다.

헌법재판소의 진가는 내무부와 비밀경찰(KGB)을 합병한 대통령에게 대해 위헌판결을 내리면서 발휘되기 시작했다.

조르킨은 이어 노동자 정년 60세 규정,임금동결 등 정부조치에 대해 연속 위헌판결을 내렸다.

그는 특히 옐친 대통령의 공산당 활동금지와 구국전선 불법화 조치를 위헌이라고 판시,옐친 대통령의 독주를 견제했다.

그는 이처럼 종종 사법권 독립을 위해 권한을 벗어나는 「모험」도 불사한다. 탁상공론에 빠져 옐친의 개혁을 방해하는 극우보수파를 준엄히 꾸짖는가하면 현재 시장경제정책이 『러시아인을 거지로 만들었다』며 옐친을 공격한다.

조르킨은 지난 12월 인민대표대회에서 옐친 대통령과 보수파의 거두 하스불라토프 의장을 탄핵하겠다고 경고했다. 양자의 대립이 러시아를 극심한 혼란으로 몰아넣고 있다고 직언했다. 조르킨은 이 모든 「모험」이 러시아의 혼란을 극복하고 민주적 개혁의 명분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정치와 법은 분리될 수 없다. 독일처럼 정치적으로 안정된 나라의 사법부는 법이 논쟁을 야기할 때까지 기다린다. 그러나 비상사태 아래에 있는 우리는 침묵하며 기다릴 수만은 없다』 사법부의 총수로서 정치에 간섭했던 이유를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50년전 러시아 극동의 한 군사기지 주변마을에서 구 소련 장성의 아들로 태어난 조르킨은 모스크바대학 법학과를 졸업한뒤 공산당에 가입한 전형적인 사회주의체제의 엘리트였다.

그러나 그는 다른 공산당원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다양하고 폭넓은 사상의 다리를 넘나들며 사고의 폭을 넓혔다. 할머니로부터 그리스정교의 신앙심을 배웠고 볼셰비키혁명 이전부터 법률학자였던 스승 스테판 키치판으로부터 민주적 이상을 습득했다.

급우들은 그를 똑똑하고 온건하며 매사를 열심인 학생으로 기억한다. 36세에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그는 내무부 산하의 한 연구소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지난 90년 인민대표대회 선거당시 후보로 나선 조르킨은 개혁파 미하일 보차로프를 밀기 위해 후보를 사퇴했다. 조르킨의 지지로 당선된 보차로프는 옐친 대통령의 지시로 조르킨에게 헌법개정의 중책을 맡겼다. 1년뒤인 91년 8월 군부쿠데타가 발발하자 조르킨은 옐친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강경보수파의 예봉을 꺾고 옐친이 집권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옐친과 의회는 헌법재판소를 신설하고 독립권을 부여했다. 조르킨과 12명의 헌법재판관에 대한 예우도 파격적이다. 임기는 종신제이고 새 아파트,운전사 딸린 자가용에 연간 1백20만달러의 예산이 할당됐다.

최근 조르킨은 새로운 제안으로 러시아 정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옐친과 하스불라토프 의장에게 4월로 예정된 국민투표 실시를 연기하라고 제안한 것이다. 구 소련시절의 헌법은 지난해 충분히 개정돼 권력분립·인권·경제자유·지방자치 등이 보장되므로 새로운 헌법개정은 필요없다는 주장이다.

그는 보혁대결의 최대 쟁점인 국민투표는 정치적 혼란을 막기위한 미봉책이라며 국민투표를 반대한다. 초인플레,분리주의운동,정치불신 등이 팽배한 현 시점에서 국민투표는 너무 위험하다는 것이다. 국민투표 강행을 주장하는 옐친에 정면 도전하는 입장이다.

국민투표 실시를 반드시 철회해야 한다고 역설한 조르킨은 『국민투표로 개혁파가 얻는 것은 패배일 뿐이고 러시아는 모든 것을 잃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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