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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기상청장 어떻게 지내나(인물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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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기상청장 어떻게 지내나(인물광장)

입력
1993.01.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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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다한 기상현대화 “숨은 봉사”/「기상정보의 경제성」등 집필 몰두/손형진씨/바둑 취미생활… 미국서 사업 장남 곁으로/김진만씨/틈나면 국궁… 부산대 강의맡기도/양인기씨기상청장직은 「변화무쌍한 하늘만 바라바고 사는 자리」지만 세속의 번잡한 인간사에 시달리는 다른 부처의 장들보다 훨씬 장수한다. 기상청장을 비롯한 기상대 직원들은 열악한 근무조건속에서 기상재해가 발생하거나 예보가 빗나가기라도 하면 빗발치는 여론의 화살을 맞아야 하지만 초대 이원철씨(작고)부터 현재 박용대청장까지 6대에 이르는 기상청장의 평균 재직기간은 줄잡아 8년이나 된다.

역대 기상청장들의 재임기간이 비교적 긴 이유는 이 자리가 전문직이라 정부내에서 큰 힘은 없지만 정치바람을 타는 일이 없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박용대청장을 제외한 역대 기상청장 5명중 현재 생존해있는 사람은 3대 양연기,4대 김진만,5대 손형진씨 등 모두 3명. 초대 이원철,2대 국채표씨는 작고했다.

우남 이원철박사는 16년동안 기상청의 전신인 관상국과 중앙관상대를 이끌었다. 이씨는 초대 기상청장뿐 아니라 여러가지 점에서 우리나라 근대화에 기여한 공로자다.

우선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이학박사(26년 천문학)로 견우성이 속해있는 독수리좌에서 새 별을 발견했다. 4등성에서 5등성으로 주기적으로 변화하는 맥동성 변광성인 이 별은 이씨의 이름을 따 「원철스타」로 명명됐다.

1896년 서울 차동에서 출생한 이씨는 연희전문을 졸업한 미국 앨비언대에서 박사학위를 딴뒤 모교인 연희전문에서 교수로 재직하다 해방과 함께 미군정하 문교부 관상국장으로 취임했다.

이씨가 연희전문에서 길러낸 학자중에는 2대 중앙관상 대장을 지낸 국채표박사도 있다.

이씨는 기상기술원 양성소를 설립,기상요원을 배출하고 장비를 도입하는 등 기상업무의 현대화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우리나라가 세계기상기구(WMO)의 68번째 정회원국으로 가입한 것도 그가 관상대장으로 일하던 1956년이었다.

이씨는 62년 66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2대 국채표씨는 이른바 「인공강우 소동」의 장본인으로 유명하다.

5·16직후 취임한 국씨는 62년 극심한 가뭄이 계속되자 최고회의에 나가 『인공강우로 비를 내리게 하겠다』고 호언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뒤 『하늘이 노해 비를 내리지 않는다』는 소문에 신경이 곤두서 있던 박정희 당시 최고회의 의장은 국씨의 장담에 귀가 솔깃해 예산을 지원해주었지만 결국 인공강우 계획은 경제성이 없어 실현되지 못했다.

비록 인공강우에는 실패했지만 국씨는 탁월한 기상학자였다. 일본 경도제대 수학과 출신인 국씨는 45년 스승인 이원철박사를 따라 관상국에 들어온뒤 61년 관상대장에 취임했다.

그는 관상대장 재직중인 63년 모교인 경도대에서 한국 최초로 기상학 박사학위를 취득,「세종대왕이래 최고의 기상학자」라는 소리를 들었다. 특히 그의 태풍연구는 세계적으로 권위를 인정받아 58년 그가 연구해낸 「태풍의 3일간 예보법」은 미국 기상학계에서도 그대로 수용했을 정도였다.

빈곤추방을 외치며 경제건설에 한창이던 60년대초 실내 불쾌지수가 85를 넘으면 근로자를 쉬게하는 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다소 기인다운 면모를 보였던 국씨는 67년 중복날 정년퇴직했다.

그림그리기와 스케이팅으로 말년을 보내던 국씨는 폭설이 내린 66년 2월5일 아침 문밖을 나서다 눈에 미끄러져 뇌진탕으로 타계했다. 유족들은 고인의 장서 5백94권을 관상대에 기증,그의 유지를 이었다.

제3대 관상대장을 지낸 양연기씨(70)는 취임 당시인 67년 동국대에서 「구름물리학」을 강의하다 역대 기상청장중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외부에서 영입된 케이스.

23년 평양태생으로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북해도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인공강우의 1인자로 평가받았던 양씨는 전임 국씨가 실패한 인공강우를 실현시킬 것이라는 기대를 모았지만 그도 인공강우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대신 양씨는 농사에 도움을 주는 쪽으로 국한돼있던 기상정보를 다양화시키는데 기여했다.

양씨는 신군부가 득세한 80년 퇴직했다. 이때 항간에는 과학기술처에 할당된 숙청자의 머릿수를 채우기 위한 국보위의 서슬에 억울하게 당했다는 동정론이 파다하게 퍼졌다.

양씨는 퇴임후 부산대에서 강의를 하다 89년 정년퇴직했다. 이후 국궁에 몰입,틈만 나면 서울 중구 장충동 석호정을 찾아 시위를 당겼다.

술을 즐겼던 양씨는 활을 쏜뒤 동호인들과 소주잔을 기울이기도 하고 저작활동을 왕성하게 하는 등 의욕적인 생활을 하다 지난해말 지병이 도져 현재 병원에서 투병중이다. 슬하의 2남2녀를 모두 분가시킨 양씨의 곁에는 부인 김인규씨(66)가 그림자처럼 붙어 간호하고 있다.

4대 김진만씨(72)는 42년 조선총독부 추풍령측후소 말단직원으로 출발,정상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다. 그가 기상대장에 취임한 83년이후 우리나라에는 본격적인 레저붐이 일면서 기상정보의 활용범위가 확대됐다. 이에 비례해 기상예보가 빗나가면 국민들의 항의도 거세지기 시작해 휴일 기상예보가 틀릴 경우 항의전화가 빗발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따라서 김씨는 재직기간중 연휴 예보에 가장 큰 신경을 썼다.

김씨는 83년 퇴직한뒤 취미인 바둑으로 소일하다 86년 미국에서 사업을 하는 장남곁으로 이민가 현재 시애틀에서 살고 있다.

5대 양형진씨(62)는 날씨예보에 처음으로 수치와 확률을 도입,「서울지방의 비올 확률은 40%」라는 식의 예보를 시작했다. 보성태생인 손씨는 55년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한뒤 곧바로 기상대 직원이 된뒤 88년 퇴직할 때까지 33년간 기상인으로 외길을 걸었다.

손씨는 퇴직후 몇몇 대학에 출강하면서 저서를 준비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현재 집필중인 저서는 「기상정보의 경제성」.

손씨는 특히 갈수록 경제적 가치가 커지고 있는 장기예보의 발전을 위해 연구를 계속해나갈 계획이다. 별다른 운동을 하지 않아도 건강이 좋다는 손씨는 현재 서울 용산구 동부이촌동 한강맨션에서 부인 이영순씨(60)와 출가안한 딸 셋과 함께 살고 있다.

우리나라 기상관측의 역사는 멀리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미 기원전 53년 신라에서는 회오리바람의 일종인 「용오름」 현상을 관측,기록으로 남겼다. 고구려의 경우도 5세기 초엽인 414년 적설량을 측정한 기록이 있다.

신라 선덕여왕(632∼647)은 천문기상관측소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첨성대를 세웠고 세종대왕시대에는 세계 최초의 측우기가 발명됐다.

우리나라 기상관측의 역사는 이처럼 유구하지만 근대적인 기상관측은 1908년 대한제국 농공상부 산하에 관측소가 설치되면서부터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한일합방이후 이 관측소는 조선총독부로 이관됐다.

오늘날 기상청의 전신은 45년 해방과 함께 미 군정청 문교부 산하에 설치된 관상국. 이 기구는 48년 정부수립후 국립관상대로 개편된뒤 87년 어감이 좋지 않다는 여론에 따라 중앙기상대로 명칭을 바꾸었다.

이 과정에서 소속부서도 몇차례나 바뀌어 문교부 교통부(62년) 과학기술처(67년)를 거친 끝에 90년 12월27일 기상청으로 승격됐다.

국립중앙관 상대로 출범할 당시 기상청의 조직은 14개 측우소와 2개 출장소,직원은 1백명에 불과했다.

45년이 흐른 지금의 기상청은 서울 본청의 3국(기획·예보·응용 기상국) 1실(개발관실)외에 4개 지방기상청(부산·강릉·광주·대전) 27개 기상대와 50개 관측소를 둔 큰기구로 성장했다. 부설기관으로는 기상연구소와 기상연수원이 있고 직원도 9백30여명을 헤아린다.

기상청의 이같은 외형적 성장은 날로 급증하는 기상정보의 수요에 비추어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현대사회에서 기상정보는 일상생활 뿐만 아니라 경제 군사 정치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고급정보로 대우받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중요한 정보를 공급하는 기상청은 건국후 지금까지 줄곧 「춥고 배고픈」 부서로 인식돼왔다. 기상청의 위상은 예산규모에서 드러난다.

93년도 기상청의 총예산은 2백87억2천8백만원. 이중 1백24억원이 인건비이고 관측장비 도입 등 사업비는 46억원에 불과하다. 이처럼 빠듯한 예산으로는 수백억원이 필요한 첨단장비 도입은 꿈도 못꿀 형편이라 기상청은 기상자료 분석에 필수적인 슈퍼컴퓨터조차 과학기술처에서 빌려쓰고 있다.<김현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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